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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25) 팔베개

  팔베개                                                                                                  (25회)


  우리 집 뒤는 버갯속 영감의 생강 밭이다. 건너 편 구도 항을 바라보며 바닷가 쪽으로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작년에는 들깨를 심더니 올해는 생강을 심었다. 한 여름이 되자 생강 이파리가 연두색에서 파랗게 나날이 달랐다. 생강 포기들도 제때 물을 먹어 통통하게 소담스러웠다. 생강의 검푸른 잎이 내 맘에 든다. 푸른빛을 품어내는 자연의 이치가 오묘해 숨이 가쁘다.

  생강 밭 너머는 황토 구릉지에 소나무가 울창하다. 끼얹은 청록색이 황토 빛 속살 위에 제 난양으로 어우러졌다. 황토가 수줍어한다면 생강은 발랄하다. 이런 자태는 뒤를 받치고 있는 개펄이 있어 드러난다. 하루에 두 번 바다와 개펄이 번갈아 생강 밭을 감싼다.


  뒤로 난 창으로 얼핏 버갯속 영감이 들어왔다. 버갯속 영감의 할머니 효행비가 있는 곳이다. 영감은 생강 밭둑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크디 큰 붓으로 질탕하게 그은 파란 물감 위에 영감이 두둥실 떠있는 것 같았다.

  삼복이었다. 장마 끝이라 따가운 햇살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길을 오가는 사람도 드물었다. 해가 중천에 이르면 사람들은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해거름이 돼서야 나왔다.


  도내는 삼복염천이라도 모든 활동을 접는 건 아니다. 바다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촌계 수입이 여간 짭짤하지 않는데다 공동체 작업이어서 빠질 수 없다. 어은(漁隱)과 도내(島內)를 망라해서 어도(漁島) 어촌계라 불렀다. ‘버갯속 영감 스토리’ 이전부터 있었던 어촌계였다.

  어촌계 작업에 안도내 주민들이야 물때를 봐가며 도내나루터까지 자박자박 걸어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간사지 건너편 어은 사람들은 다르다. 도내로 넘어올 때는 구경거리이다. 남정네들이 작업 장구를 갖춘 아낙을 경운기나 오토바이로 태워다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나가는 이들을 마치 내가 열병(閱兵)을 하는 기분이다.

 

  이맘때면 개펄에서 남자들은 낙지를 잡고 여자들은 바지락을 긁었다. 오뉴월 뙤약볕에 낙지를 이 백 개(마리)를 잡았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여자들도 바지락 오십 킬로그램 정도를 간단히 들쳐 메고 나왔다.

  낮이 길어 썰물이 두 번 있는 날에는 낙지를 잡으러 두 번을 바다에 나간다. 힘과 기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억척스럽다. 들 물에 서둘러 소라를 짊어지고 나오다 등에 상채기가 나기도 한다. 어획물은 어촌계와 연간 계약이 된 중간상이 와서 그날그날 시세에 따라 몽땅 실어갔다.

  이곳 낙지는 박이 한창 영글어가는 이즈음이 제철이다. 세발낙지 비슷한 크기에 요즈음 도내 인근에서 잡는 낙지가 ‘밀국 낙지’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놈들이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갖은 채소에 듬성듬성 박속을 썰어 넣은 국물에 밀국 낙지를 몇 웅쿰 집어넣어 끓여낸 것이 ‘박속 밀국 낙지탕’이다. 흔히 연포탕이라 하나 박속 밀국 낙지탕이 더 시원해 보인다. 여기에 수제비나 칼국수로 마감을 하면 도내가 자랑하는 여름철의 보양식(補陽食)이 완성된다.

  열 개만 달라고 부탁하면 동네 사람들은 다들 하나같이 퇴박을 주었다.

  “아니 고까짓 걸 워디 붙일 거여.”

  본래 내가 식사량이 적은 편이긴 하나 바닷가라 먹성의 단위가 달랐다. 꿈틀거리는 낙지를 나무젓가락에 끼어 소금장에 찍어먹는 맛이 일품이다.

  바지락은 진달래 필 때가 맛이 최고라 했다. 탱글탱글하고 속살이 찼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바지락 작업이 중단되었다. 날씨가 더워선지 장마가 길어선지 바지락이 폐사하는 바람에 해양수산부에서 나와 현장조사를 하기도 했다.

  얼마 전 ‘여섯시 내 고향’이라는 방송프로에 어도어촌계의 활동이 꽤나 길게 나왔다. 촬영을 하면서 남긴 얘깃거리가 동네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바다와 땅을 오가며 사람 사는 온기가 절로 피어났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서산 인터체인지를 벗어난다. 서산 시내 끝자락에 있는 전자랜드를 비껴나 태안 쪽으로 틀자마자 곧장 어송 삼거리에 다다른다. 대문 마트가 시야를 막고 간이 버스 정류장이 언제나 한가롭다.

  밋밋하나 수더분한 농촌 풍경이야 팔도강산 어디나 다를 바 없다. 몸이 가고 마음이 머무는 곳이 고향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굳이 태안 육쪽 마늘에 열을 올린다. 밀국 낙지를 설명하면서 절로 흥이 난다. 그저 태안(泰安)과 도내(島內)를 묻어두고 싶은 마음일 뿐이다.

  호리(虎里)와 성연(聖蓮)의 갈림길 신호등이 느긋하다. 좌회전을 해서 서산과 태안의 경계를 이루는 제방 길을 지나자 도내나루터 표지판이 보인다. 바로 오르막 언덕길로 올라서면 안도내다. 눈으로도 들리고 귀로도 보이는 도내의 물정이 어느새 몸에 배였다.

  오르락내리락 구불구불 길 따라 이십여 호가 처마를 맞대어 눌러앉았다. 초입이 우리 집이고 맨 끄트머리쯤에 버갯속 영감 집이 있다.


  “이망 벗거지겠십니더. 이 시간에예.”

  생강 밭은 그야말로 파란 물감으로 도배를 했다. 내가 다가가자 버갯속 영감은 담뱃불을 눌러 끄며 고쳐 앉았다.

  “잇따 김 형네 집에 들리려구 했는디... 먼첨 왔네그려.”

  영감은 가끔 나를 김 형이라고 불렀다.

  “덥지예?”

  “간밤엔 웬 비바람이 그리 친다나. 아침 되서야 수꿈해지데. 어이구. 비는 고만 와야 하는디.”

  “이자 푹푹 찔깁니더.”

  “더울 땐 더워야 하는 벱이여. 모 다 때가 있는 거여.”

  버갯속 영감과 나는 동시에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에는 이글거리는 태양뿐이었다.

  “오늘 무신 일이라도예?”

  “머 일이야 있남. 김 형 보는 기 일이지.”

  “아침부터 찌네예. 고마 집으로 들어가입시더.”

  영감 머리 위로 손바닥만한 소나무 그늘이 겨우 얹혀있었다.

  “깝깝혀.”

  “보리때 모자라도 좀 쓰이소.”

  “맥고자? 어이구, 더 더워. 골을 패.”

  나는 영감이 모자를 쓴 걸 보지 못했다.

  영감은 긴팔 흰 셔츠에 바지차림이었다. 그리고 하얀 운동화를 신었다. 운동화가 새 거였다. 내가 신발 치레 인사를 했으나 영감은 당신의 발을 한 번 내려다보는 걸로 지나갔다.

  “생강 밭에 요 풀 말이여. 장마통에 워찌나 커는 지, 쯔쯔. 눈만 들렸다하머 이 맨큼이나 자러.”

  영감은 두어 자 높이로 손바닥을 펴서 올렸다. 그만큼 잡초가 빨리 자란다는 표시였다. 영감의 차림새로 보아 생강 밭일을 하러 나온 건 아니었다. 마침 한줄기 마파람이 불어 와서 구도 항 쪽으로 빠져나갔다.

  “어이구, 바람 한번 시원네그려.”

  “거, 씨할 바람이네예.”

  버갯속 영감과 나는 이구동성이었다.

  어도를 가로지르는 앞뜰은 벼가 불어오는 바람에 일렁거렸다. 아까보다 한 뼘은 넓어진 소나무 그늘로 버갯속 영감과 나는 엉덩이를 들어 옮겨 앉았다.


  바로 앞에 팔봉산(八峯山)이 다가왔다. 오늘따라 시야를 가로막으며 우람했다.

  “팔봉산이 말이여... 본시는 구봉산인걸 아남?”

  영감의 질문이 한가했다. 팔봉산은 일제가 쇠말뚝을 박았다는 영산이다. 얼마 전 서산(瑞山)의 어느 시민 단체에서 끝내 그 말뚝을 찾아서 빼냈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본시 구봉이라네. 봉 하날 제껴 놓구 팔봉이라 허니께 섣달그믐 만 되머 그 놈이 서러워 ‘구봉 구봉’ 허며 운다는 거 아녀. 허긴, 내가 보았나, 들었지.”

  영감이 야담 한 자락을 자문자답했다. 나는 새삼스레 세 보았다. 손가락을 들이대 봉우리 숫자를 한참 더듬었다. 팔봉인지 구봉인지 십 봉인지 헤아리기 나름이었다.

  모처럼 나는 팔봉산 자락을 막아선 구도(舊島)와 호리(虎里)를 지나 가로림만(加露林灣)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허허, 조긴 염밭이었구, 꽃섬이 있었슈.”

  버갯속 영감은 구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영감의 시선도 나를 따라 왔다.

  “소나무 몇 개 서 있는 조게가 그 섬 자린디 양어장이 되어 버렸슈.”

  “글쎄 말입니더. 가만이 있는 기 없지예.”

  “요기가 딴섬, 조기가 꽃섬 그러구 저 재빡 안쪽으루 울구지 섬이 있었슈. 바다가 논이 되어 버렸응게... 허허, 그러큼 오래 전이 아니라니께...”

  오늘따라 영감은 역시 충청도 사람이었다.

  재 너머 안쪽까지 바다였다.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때부터 수백 년 동안 하다 말다 끝내하지 못한 굴포운하(掘浦運河) 자리를 지나 옛날 조창(漕倉)이 있었던 상창(上倉), 북창(北倉)으로 이어졌다. 이젠 제방을 막아 한길을 내고 물길을 가두어 경작지를 일구었다.

  영감은 생각나는 대로 보이는 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영감의 표정은 지난 세월이 엊그제 같았다. 오늘 영감의 시선은 드물게 북쪽에 머물렀다. 청춘시절에 꽃섬, 울구지 섬서 뿌린 사연이라도 있는 걸가. 

  

  “근디, 올해 월마여?”

  “내일 모레 육십 입니더.”

  “아즉 멀었슈.”

  “...........”

  “한 해 더 먹는 거이 워뗘? 먹을 만 혀? 허허, 올해두 반이 지났네그려.”

  “나이 묵어 좋은 거야 있겠십니꺼. 지 혼자만 안 묵을 수도 없고예.”

  “허허, 육십 만 지나봐. 시월(세월)이 원제 갔는지 몰러. 어떤 이는 시월이 오토바이 탄 것 같다데...”

  “...........”

  “가는 시월... 다 소용 없슈.”

  영감의 어느 새 남쪽으로 돌아앉았다. 오소산을 가린 해송 너머로 백화산 꼭대기가 아물거렸다.

  해송 사이로 오솔길이 아가자기하다. 이른 아침 숲속은 제멋에 겹다. 이마에 떨어지는 찬이슬에 놀라고 볼에 물안개가 스치는 날이면 세상살이가 간지럽다. 봄에는 진달래가 듬성듬성 요란스럽지 않아 미덥다. 여름날엔 죽죽 뻗은 홍송 그늘이 하늘아래 시원하다. 자리 펴 낮잠 한 숨이 아니 즐거울 소냐.

  영감은 더 이상 말이 없었고 나는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새파란 창공에 눈이 시렸다.


  갈매기가 없을 가. 

  구름 두둥실 

  가로림 따라 흐르고. 

  간다.

  청산리 어느 메 

  갈매기 혹시 쉬고 있을지니...


  내가 꿈을 꾸었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 가.




                                                                                                              새해 뵙겠습니다. 계속 연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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