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26) 울타리

울타리                                                                                                         (26회)


  “멀리서 보니께...”

  영감이 정적을 깼다.

  “용구새가 지대로 되었슈.”

  영감은 지붕의 용마루를 보고 말했다. 저 밑으로 우리 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양쪽 용두 사이에 용마루가 흐르고 귀마루가 멋을 부리며 막새가 가지런히 굴곡을 이루었다.

  “기와집은 저게 예쁘야 한다쿠데예.”

  “그렁게 기와집이 어려운기여.”

  “잔소리 깨나 함시러 신경 썼지예...”

  “허허, 모텡이에 벙구나문 원제 심었다나? 근디 대나문 집 뒤에 심지마랑께. 거참, 말 안 듣네그려.”

  갑자기 화제가 바뀌어 나를 긴장시켰다.

  영감은 봄에 심은 참두릅나무를 이제야 보았다. 당초 시눗대를 뒤란에 심었더니 온 동네가 요란했다. 뿌리가 번지는 날이면 어떻게 감당할거냐 방구들 뚫고 올라온다는 소리 못 들었느냐는 둥 곧 큰 일이 날듯 오가는 사람들의 입쌀이 거셌다. 동네북에 천덕꾸러기가 돼버린 시눗대를 나는 수돗간 옆에다 몰아 심었다. 영감은 아직도 집 뒤인 줄 알고 서문 없이 말했다.

  “그러구 밥풀꽃 말이여. 개나리 새다 심었던디, 앰기야 할기여.”

  지난봄에 밥풀 꽃이라면서 두 그루를 나에게 주었다. 임시로 심어두고서 미처 제 자리를 찾아 옮기지 못했다. 내가 잊어버리고 있던 밥풀 꽃을 영감은 언제 어떻게 보았는지 용케 기억을 건져냈다. 그저 지나치는 것 같아도 볼 건 다 보는 영감의 눈썰미는 오늘도 칼날이었다.


  “마즌짝에 조기 조, 검풀 좀 봐. 어이구.”

  영감은 턱을 내밀어 가리켰다. 이런저런 야생초들이 개나리 사이에서 덤불을 이루고 있었다. 어감으로 보아 잡초 논쟁이 재연될 가능성이 커졌다.

  “..............”

  나는 입을 다물고 눈만 껌뻑였다. 그 때 이후 잡초 말만 나오면 나는 조용히 패를 거두었다. 어떤 강변도 설득도 통하지 않았다.

  한번 대거리를 하자면 영감이 가리킨 우리 집 뒤란이 막무가내 잡초 검불은 아니었다. 그냥 두니 저들끼리 알아서 재미있게 군락을 지었다. 영역을 정해 적당하게 간격을 유지하거나 덩치를 자율적으로 조절을 하는 것 같았다. 스스로 이루는 자연이 볼수록 경이로웠다.

  쑥 무더기는 오묘했다. 어릴 때 쑥에게 신세진 생각이 은연중에 남아서일 가. 쑥 만큼 우리 생활에 가까운 식물도 없다. 나는 축대 끄트머리나 울타리 사이에 웃자란 쑥을 쳐주거나 모양에 따라 몽실 몽실하게 숱을 다듬었다. 쑥대머리를 손질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거라며 혼자 웃었다. 그런 나를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다 볼까봐 괜스레 신경이 쓰였다. 아무리 미용을 한 쑥도 버갯속 영감에게는 그저 잡초였다.

  “저 쑥 좀 봐. 검부락지 맨글어 뭐 할 기여?”

  영감은 다시 열을 올렸다.

  “울타리지예.”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라구?”

  나는 얼른 영감의 손을 잡아당겨 손바닥에 ‘울타리’라고 손가락으로 또박또박 썼다.

  “뭐시라구? 울타리? 쯔쯔.”

  실눈을 크게 떴다. 영감의 토끼눈을 나는 처음 보았다. 

  “맞십니더. 잡초 울타리예.”

  나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살다 별놈 소리 다 들어보겄네잉.”

  “울매 좋십니꺼.”

  “어이구, 정 그러머 울타리 하나 내가 지대로 지어줄게잉.”

  영감은 한심해도 이렇게 한심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울 놔뚜고 맨들 긴 뭘 맨듭니꺼?”

  내친 김에 나는 강변을 했다.

  “허허...”

  영감은 말없이 먼 산으로 머리를 돌렸다.  

 

  해를 넘긴 개나리가 부쩍 자랐다. 아직 울타리 구실을 하기엔 멀었다. 우리 집이 길옆이다 보니 울이 급했다. 개나리를 따라 이런 저런 나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갖다 심었다. 이팝나무, 조팝나무, 동백, 두릅, 앵두나무, 찔레, 그리고 넝쿨장미가 어우러져 적당히 경계를 이루었다. 수돗간 옆 시눗대는 금방 물이 올라 하늘을 찔렀다.

  집 뒤 길 쪽에 한 자 정도 너비의 도랑이 있다. 고무로 된 U관(管)을 깔았는데 말이 도랑이지 없어도 그만이다. 자기 집에서 나온 물은 자기가 받아야 한다기에 뒤늦게 품을 들여 만들었다.

  도랑 옆으로 쑥, 피, 개비름이 제 세상을 만났다. 개나리 줄기 사이로 난 틈을 막아 울타리 보조로 안성맞춤이었다. 뒷문을 종일 열어두는 여름에는 자동차가 내는 먼지를 꽤 막아주었다. 딱딱한 담벼락보다 얼기설기 나무 울타리가 운치를 더해 백번 나았다. 취병(翠屛)이라면 이런 취병이 없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제초작업을 할 때가 문제였다. 명절 앞이나 계절이 바뀔 때 온 동네가 나서서 미화작업을 했다. 집집마다 예취기란 예취기는 모두 동원되었다.

  이른 새벽에 멀리서 ‘엥 엥’ 하는 예취기 엔진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잠이 확 깼다. 집 쪽으로 점점 가까워올수록 심장 박동 수가 따라 올라갔다.

  멀리서 보면 지뢰 탐지기를 든 병사 같았다. 마스크를 장착한 폼에다 길 양쪽에 두 줄로 늘어서서 진입하는 형색이 물 불 안 가리는 점령군이었다. 길 가의 잡초는 단숨에 평정되었다. 동네 간선도로는 갈기갈기 찢어발겨진 잡초의 잔해로 썰렁했다.

  우리 집 둘레는 예취기의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말끔히 해치워버렸을 때는 황당했다. 정성들여 다듬어 놓은 잡초 울타리에 예취기 칼날이 사정없이 지나가버린 자국은 황량했다. 설령 내가 있었다하더라도 예취기의 진로를 돌려놓기는 쉽지 않았다. 바짝 붙어 서서 막더라도 막무가내의 칼날만 간신히 모면하는 정도였다.

  얼마 전에 박 씨가 우리 집 뒤를 일부러 깎아주었다. 농기계가 다니기 불편했는지 정기적인 미화작업이 아닌 데도 자기 집에서 우리 집까지 잡초덤불을 말쑥이 정리했다. 박 씨는 나에게 선심을 쓴 걸로 생각하기에 마지못해 나는 겉발림 인사를 했으나 한참 가지를 뻗히는 뽕나무마저 후리는 바람에 말은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


  “허여간 별스런 사람이여.”

  영감은 나를 향해 두어 번 검지를 흔들었다. 며칠 전에 끝내 영감에게 들키고 말았다.

  “씨잘 데 없이... 검풀 우덜거지 걷는 양반, 처음 본다니께.”

  내가 쑥 무더기를 다듬는 걸 두고 영감은 어깃장을 놓았다. 마당에서 서재로 가는 모퉁이에 저절로 난 쑥이 화초보다 소담스러웠다.

  “이런 거 볼라꼬 온 거 아입니꺼.”

  내가 처음으로 반격을 했다.

  “.............”

  영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히죽이 웃었다. 이 때다하며 나는 한술 더 떴다.

  “다들 마당에 향나무, 소나무 심어라카는데... 여기 저기 전부 소나문데, 그거 몇 개 심어갖꼬 뭘 하겠십니꺼?”

  “허허, 이 사람, 검부락지 키우러 왔남?”

  영감도 한마디로 나를 쏘았다. 주거니 받거니 오늘은 일진일퇴였다.

  발아래엔 이름 모를 풀이 나에게 눈짓을 했다. 초록 잎사귀 사이에 쥐 눈 만 한 파란 꽃이 다가와 속삭였다.


                                                                                 계속 연재 예정


'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림  (0) 2009.01.08
귀촌일기- (27) 상열지사  (0) 2009.01.06
귀촌일기- (25) 팔베개  (0) 2008.12.31
귀촌일기- (24) 잡초  (0) 2008.12.25
도내 일몰  (0) 2008.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