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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23) 팽나무

팽나무                                                                                        (23회)

 

  양파 때문에 몰아쉬었던 숨은 담배로 진정이 되었다. 두 손가락 사이에 눌린 꽁초에서 느릿느릿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저러나 오늘 밤이 걱정이었다. 허리에 양파 후유증이 도져 영감의 아들이나 며느리한테 오늘 일이 들통나지 않아야 할 텐데.

  

  “근디 말이여...”

  영감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뜸이 길었다. 영감은 양파 망태기에 짓눌렸던 허리를 펴며 상반신을 정돈했다.

  “거참...”

  버갯속 영감은 어물쩍거렸다.

  “.............”

  나는 영감의 안색을 살폈다.

  “시간이 없네그려. 뭘 허는지 말이여.”

  영감은 말을 굴리며 조심스러웠다.

  “예?”

  “아니, 약쑥 말이여. 어이구.”

  오월 단오 무렵에 꺾기로 했던 약속이 차일피일 지나고 있었다. 산딸기와 매실이 시장 좌판에 깔렸다. 뽕나무 오디도 감자 밭둑에 지천으로 떨어졌다. 부엌에 누워있던 부지깽이도 기어 나오는 유월이었다. 날이 길어 바쁜 사람 더 바쁘고 부지런한 사람 더 부지런했다. 노인들도 경로당에 가는 사람이 없어 문을 닫았다.

  모내기가 겨우 끝나자 마늘, 감자, 양파 추수에 바지 가랭이 흘러내리는 줄 몰랐다. 장마 전에 서둘러 생강과 고구마까지 심어야 삼복에 그나마 부채질이 할랑하다.


  버갯속 영감도 바빴다. 허리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한다면서도 못 하는 일이 없었다. 자질구레한 일은 자분자분 혼자 다 했다. 노인이 하는 일이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 생각하면 코 다쳤다. 잘 밤에 허리가 끊어져도 영감의 일상은 한시반시 쉬지 않았다.

  이 일 아니면 저 일이 기다렸다. 고를 건 고르고 꿰달아 맬 건 매고 묶을 건 묶고 제 자리에 놓을 건 반듯반듯하게 제 자리에 놓았다. 주위에서 뭐라 해도 당신 일이라 생각되면 당신 몫이었다. 영감의 생활 철학이자 신조였다.

  요사이 영감은 할멈과 함께 하우스에 연일 출 퇴근이었다. 농협에 수매한 뒤 너더분히 남아있는 마늘과 양파를 풀어헤쳐 쓸모를 봐가며 일일이 가렸다. 돈이 되건 안 되건 버리기는 아까웠다.

 

  버갯속 영감은 약쑥의 약속을 오늘도 잊지 않았다. 결국 그 말이 그 말이라 나는 긴장을 풀었다.

  “조선 천지에 영감님보다 바쁜 사람 오데 있십니꺼?”

  농담을 건네며 분위기를 바꿨다.

  “시간이 없네그려.” 

  “돌아가시면 또랑 치고 마당은 누가 씰까예. 걱정이네예.”  

  “나덜 가라구? 어이구, 나 안 죽어.”

  “예? 예예, 오래 사시이소.”

  허리 아파 죽겠다 하면서도 영감은 결코 죽을 생각이 없었다. 잠간 앉아있는 사이에도 무언가 줍고 털고 뽑았다. 그런 영감의 엉덩이 자리에 풀이나 날 가.

  “......  온 사방 풀약 치구... 요 근방엔 없슈. 봐 둔디가 있시이. 시간을 잡자구.”

  영감은 구부정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언제든지예.”

  “그거 참, 뭘 허는지...”

  영감은 다시 고추를 불었다. 

  “뭘 하시는지 내가 우찌 압니꺼.”

  나는 은근 슬쩍 놀렸다.

  “............”

  영감의 뜨악한 표정이 재미있었다. 

  “할마시한테 맨날 혼낭께네 시간이 없지유.”

  “뭬라구?”

  “약쑥은 약쑥이고예, 할무이한테나 잘 하이소.”

  “잘 허구 멀구가 있남?”

  “아무래도 지은 죄가 많을 끼라예.”

  “새깜맞게 죄는 무신 죄. 난 그런 거 없슈.”

  “왕방울 빳찌 달고 그런 거 없는 양반 못봤심더. 태안읍내 다방...”

  “어이, 이런.”

  영감은 주위를 살폈다.

  “조끔 있기는 있네예.” 

  “씨잘데 없이... 워디서 들었남?”

  “다 알데예.”

  내친김에 영감을 몰아갔다.

  “누가? 어이구...”

  영감은 검지를 뽑아 나를 향해 흔들었다.

  “누구고 자시고 없심니더. 제각 뒤 팽나무도...”

  “팽나무가? 허허.”

  영감은 적적 입맛을 다셨다. 영감은 더 이상 버티지 않았다. 동네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한 시절이 영감에게 있었다. 그 때 걸린 오금이 세월이 갔다고 펴질 리가 없었다. 

  “할무이 말입니더...”

  “어이...”

  “지난봄에 경로당서 봤는 데예, 손수건 풀어 약까지 챙겨 멕여주데예. 놀랠 노 자 아입니꺼.”

  “허허.”

  “약쑥일랑 잊어삐리고예, 할무이나 잘 주물러 주이소.”

  “흠흠.”

  영감은 허공을 향해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히죽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허긴, 말이여. 저 배 씨네도 감태(甘苔) 매다가 미끌어져... 팔이 뿌러졌다데.”

  옆집 아주머니가 정초부터 바다에 나갔다가 얼어붙은 바위를 헛디뎠다. 평소 부지런하다 못해 일 욕심을 타고났다. 이런 아줌마가 근 석 달을 꼼짝없이 기브스를 한 채 지냈다. 오다가다 옆에서 보는 내가 더 갑갑했다.

  “한두 푼 모으는 재미아입니꺼? 죽으나 사나 자석새끼들이 아롱거링께네예.”

  내 말이 끝나기 전에 영감이 가로챘다.

  “우리 집 할매도 큰 일 날 뻔 했슈.”

  “예?”

  “김 걷으러 갔다가 죽을 뻔 했다니께. 들물이 차서 들어오는디...”

  말머리에서 영감은 벌써 숨이 가빴다.

  “뻘구디 빠져서 말이여. 어이구, 바다에서 혼자 뻘구디 빠지머 건져줄 사람도 없다니께. 기운 없으머 항우장사도 못 나와. 그 길로 기냥 가는 기여.”

  영감은 하마터면 할멈을 잃을 뻔 했던 순간을 더듬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 돌아온 할멈을 마치 생중계하듯이 해설까지 곁들여 생생하게 그려냈다. 턱에 숨이 차오르는데다 말마저 엉기는 영감을 보니 내 코끝이 찡했다.

  “어이구...”

  영감은 말을 잇지 못했다.

  “칠십이 넘은 할망구가 갈 데가 아이여... 고게가 워디라구...”

  푸념인지 하소연인지 영감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애간장을 태우게 한 할멈이 새삼 원망스러웠다.

  “요 근처서 글키 간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여. 어이구.”

  영감의 눈시울에는 잔잔하게 물기가 어렸다. 이러쿵저러쿵 해도 할망구는 할망구였다. 

  “에이구, 끔먹허더이 또 가데. 현수한테 그러큼 혼쭐나구두 또 가더라구. 시절(바보)이여. 욕심이 사람 잡는 거라니께.”

  아들한테 혼이 난 할멈이었다. 역성들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와 겹쳐 말끝마다 애틋함이 묻어났다. 짼 한 할매 사랑은 오십년이나 묵어 진득했다.

  영감은 할멈을 ‘우리 집 할매’라고 일컬었다. 오늘따라 ‘우리 집’이라는 접두어가 내 귀를 뚫었다. 영감에게 어떨 때는 ‘할망구’가 되고 어떨 땐 ‘우리 집 할매’였다. 언젠가 대나무 다루는 솜씨 이야기할 때 들어보고 두 번째 들었다. 

    

  “나 쪼랭이 하나 만들어 줄께잉. 우리 집 할매가 다른 덴 몰라두 우리 집에는 맨들어 주라데. 나허구 가깝게 지낸다구. 달력도 주구. 고맙게 생각허구. 나 말이여. 바구리, 다람치도 잘 맹글어.”

  조랭이는 구두 약속에 아직 기별이 없다. 결코 빈말을 하는 영감이 아니므로 내년 정월 대보름까지 기대는 살아있다.

  

  “묵을수록 좋은 기 장맛이고 마누라라 카데예. 철들자 노망한다 말이 있지예. 옛말이 쫀득쫀득 씹을 기 있어예.”

  나는 들은풍월을 내 말인 양 읊었다.

  “.............”

  영감은 내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도 있데예. 있을 때 잘해라꼬.”

  “허긴 그려.”

  왕방울 배지가 폼을 재던 시절은 갔다. 죽으나 사나 안방에 덩그러니 마주 앉은 사람은 영감 할멈 둘이었다.

  버갯속 영감 할멈의 막내딸이 부산(釜山)인가 어디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애물단지가 애처롭기는 영감 할멈 누군들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천과 서울에 사는 둘째와 막내아들 얘기는 영감이 여러 번 했어도 딸 얘기는 없었다.

 

  “허허, 시간이 자꾸 가네그려.”

  영감은 다시 미진한 마음을 달랬다.

  “짬나는 대로 하입시더. 단오 지난 지 울매 됐십니꺼?”

  “그려, 시간 내 보자구잉.”

  영감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양파를 들쳐 메고 왔던 영감은 약쑥의 십자가로 바꿔 멨다. 양파보다 무거운 약쑥의 약속을 등에 지고 어슬렁어슬렁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계속 연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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