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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갯속 영감 교유기(交遊記)

귀촌일기- (22) 서리

서리  (22회)

 

  “형철씨 있는감?”

  버갯속 영감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있남? 있남?”

  이내 현관문이 요란했다. 열어보니 버갯속 영감은 들숨날숨이었다. 

  “어이구, 허리야.”  

  “아이고예, 갑자기 무신 일입니꺼? 들어오시이소.”

  “어이구... 저 밑에서... 보니께잉... 차가... 있데.”

  영감은 가쁜 숨을 진정시키느라 안간힘을 썼다.

  “소릿길이... 숨은 더 차네...”

  영감은 두어 걸음 물러나 현관 앞 계단에 주저앉았다.

  저 밑이라면 우리 집 아래로 보이는 비닐하우스를 말했다. 화물차가 드나들 정도로 큰 비닐하우스 세 동이 버갯속 영감 집 것이었다. 거기서 올려다보면 우리 집이 빤히 보였다.

  “차가 있구... 없는 거... 보머 알거덩...”

  내 차가 보이면 샛길로 한달음에 달려오곤 했다.

  “내... 양파 죄끔 가져왔네.”

  “양파를 요?”

  계단 옆에 분홍색 양파 망태가 덩그렇게 놓여있었다. 비로소 나는 버갯속 영감이 어깻숨을 몰아쉬는 이유를 알았다. 그곳에서 오는 길이 지름길이긴 하나 오르막이 가팔랐다.

  “이걸 우찌 가져오셨십니꺼?”

  “들고서 올 수야 있남. 이러키 묶어... 들쳐메구서 왔지.”

  영감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양파 망태가 울룩불룩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중간 중간을 노끈으로 묶은 다음 멜빵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무게를 가늠해보려고 슬쩍 들어보니 어림없었다. 두 손을 모아서야 나는 간신히 들 수 있었다.

  “제가 차로 가져오모 될낀데... 우째 이러케?”

  “장마가 온다는구머. 미리 주어야지. 지나고 주머 소용없슈.”

  “제발 이러지 마이소. 허리 아픈 거 말짱 거짓말 아입니꺼.”

  내가 내 허리를 치자 영감은 곧장 알아들었다. 하루 내내 영감은 비닐하우스에서 양파 분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장마전선이 북상한다는 소리로 마음이 뒤숭숭하던 터에 마침 내 차가 보였다. 하던 작업일랑 밀쳐두고 그 길로 달려온 게 분명했다.

  “허허. 낭중에 주머 소용이 없다니께.”

  “나중이고 뭐고, 이러시모 인자 아무 것도 안 받을 낍니더.”

  “어이구...”

  “주실라카모 말만 하시이소. 이망에 신짝을 붙이고 갖다 먹을낑께네예.”

  “그러무 되남. 가져다 줘야지...”

  “그런데예, 이런 걸 주시도 되는 깁니꺼? 농협에 내야지예.”

  “허허. 무신 소리여. 주는 건 좋은 놈을 주어야 혀.”

  “예?”

  “그래야 기분이 좋다니께.”

  “..............”

  “허허, 넘이 기분이 좋으머 내 기분도 좋다 말이여.”

  영감의 한마디 한마디는 허허바다에 돛단배 같았다. 

 

  ‘주는 건 좋은 놈을 주어야 혀.’

  ‘그러무 되남. 가져다 줘야지...’

  참으로 쉬운 말이었다. 그러나 이 말만큼 실천하기 어려운 말도 없었다. 영감에겐 줄 때도 예의가 있고 규범이 있었다.


  오늘 갑자기 왜 이 무거운 양파를 들쳐 매고 왔을 가? 장마가 닥아 온다지만 아직 먼발치여서 화급을 다툴 이유가 없었다.

  나는 영감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혼자서 웃었다. 내가 실없이 웃자 영감도 따라서 벙싯 웃었다. 그러나 내가 웃는 이유를 버갯속 영감이 알 리 없었다. 영감이 당신 가족 몰래 삥땅을 쳐 가져온 양파가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양파를 보니 나는 작년 늦가을이 생각났다. 가을이 깊어 입동을 지나니 새벽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첫추위라 몸이 더 움츠려들었다. 온 동네가 겨우살이 준비에 눈 코 뜰 새가 없었다.

  메주를 쑤는 콩깍지 연기가 굴뚝에서 피어올랐다. 골목을 따라 아낙들은 김장 품앗이에 종종걸음을 쳤다. 까치밥 홍시가 쪽빛 하늘 가운데 한가롭고 추녀 밑에는 무시래기가 축 늘어졌다. 완연히 한해가 저물어 가는 길목이었다.

  “김 형네는 안 하남? 다들 김장헌다구 야단인디.”

  영감은 우리 집 김장 걱정을 해주었다.

  “왜요? 해야지예.”

  “그려. 김치는 담가먹어야 혀. 바깥에서 먹어 보머 고게 김치여? 어이구.”

  “그렇지예. 감칠맛은 다 어데 가고...”

  “김장이 반농사여. 먹을 게 뭐 있었남?”

  겨우내 우리 조상들은 김치 하나로 버텼다. 신 김치나 묵은지는 맛 따라  쓰임새가 달랐다. 얼음 알갱이가 버석거리는 동치미가 긴긴 겨울밤을 지탱했다. 김치 독에서 갓 꺼내 톡 쏘는 그 맛이 아련하다. 

  “이제사 보이네예. 버린 거... 잃은 거...”

  “요샌 먹을 거이 너무 많어.”

  “김치가 달라진 건지... 입맛이 변한 건지...”

  “우리 배추, 맛있는 배추여. 갖다 먹어.”

   

  버갯속 영감 댁은 종가의 큰살림이었다. 그동안 많은 양의 김장을 해서 객지에 나가있는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어왔던 것 같았다. 아마 그 일은 영감 며느리의 몫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영감의 집에 무슨 변화가 있었다. 당초 가꾼 김장 배추가 갑자기 절반 이상 남아버렸다.

  “배추 울매나 주던기여?”

  “예?”

  “글씨, 울매나 주더냐구?”

  영감은 나를 볼 때 마다 새삼스럽게 물었다. 몇 번이나 끈질기게 묻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는 배추를 갖다 먹으라는 버갯속 할멈의 말씀이 집사람에게 있긴 있었다. 그러나 집 사람은 할멈이 주는 배추 오십 포기에다 오십 포기를 더 보태 백포기를 아예 사서 서울에 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애써 진 작물을 거저먹을 수는 없었다.

  배추 백포기가 적은 양이 아니었다. 하우스에 임시로 보관해두고 틈나는 대로 서울까지 승용차로 실어 날랐다.

  여자들끼리의 일이라 나는 자초지종을 몰랐다. 우리 집에는 거저 주라했는데 할망구가 배추를 팔았다는 사실을 영감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영감으로선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돈을 받았다면 덤으로 더 주어야 할망구가 구긴 스타일을 그나마 회복하는 길이라 믿었다.


  “있남? 어여 나와.”

  “아이구. 새복부터 웬일이십니꺼?”

  현관문을 여니 버갯속 영감이 잠바차림에 오뚝하게 서있었다. 온천지가 간밤에 내린 무서리로 하얗게 변했다.

  “빨랑 감세. 나랑 가자구.”

  “좀 들어 오세유.”

  “들어가긴... 뭐. 냅다 가자니께.”

  버갯속 영감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채근을 했다.

  “아니, 뭔데예?”

  “배추 말이여. 오늘 밤에 눈 온댔서. 얼룽 뽑아야 한다니께. 우리 집 할망구도 그리루 갔슈.”

  “.............”

  “허허, 어여.”

  아침 뉴스에 큰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긴 있었다. 눈이 내리기 전에 밭에 남아있는 배추를 처분할 일이 영감으로선 급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길로 따라 나섰다. 두툼한 통바지에다 잠바를 주섬주섬 걸쳤다. 영감을 옆자리에다 태우고 배추밭으로 차를 몰았다. 내가 아침밥도 안 먹고 나왔다는 사실을 그 때야 깨달았다.

  “그런데예, 아침 식사는 하셨십니꺼?”

  이삼 분 거리가 서먹해 영감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허허, 평생 먹는 거이 밥인디...”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예. 식사는 제 때 해가면서예.”

  “어이구, 고거 한 끼 안 먹어무 죽남?”

  영감은 퉁명스러웠다. 아침 밥 이야기 꺼냈다가 나는 본전도 못 건지고 말문을 닫았다.

  버스 종점에서 나루터로 가다 솔밭 모서리를 돌아서자 몇몇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배추를 대충 다듬어서 몰고 온 차에 싣는 등 어수선했다. 버갯속 할멈도 눈처럼 서리가 내린 밭 가운데 서있었다.

  “다른 이 같으면 꿈쩍도 안할 이이가... 아저씨한텐 기냥 달려가데...”

  버갯속 할멈은 나를 보자 말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 조용조용해서 모기소리였다. 할멈은 언제부턴가 나를 아저씨라 불렀다.

  “아, 그러셨습니꺼?”

  나도 머리를 꾸벅하며 인사를 했다.

  “어제부터 허리 아프다구... 왼종일 꿈쩍도 안하더니...”

  “인자 저랑 친구 다 됐는갑지예.”

  나는 처음으로 버갯속 할멈한테 당신 남편을 친구라고 불렀다.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찬 공기를 가르며 칼날처럼 교차했다.

  “친구 만나머 아픈 허리도 낫나벼.”

  “친구 좋은 기 그런 거 아입니꺼.”

  “채려논 밥도 안먹구...”

  “밥이야 맨날 묵는 밥인께네예.”

  “나, 처음 봤씨유.”

  할멈과 나 사이에 말이 쫀쫀하게 길어졌다.

  “아니, 이 할망구가 뭐라 그려?”

  저쪽에 있던 버갯속 영감이 다가오며 물었다. 할멈과 내가 무슨 이야기를 오래 동안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저더러 참 좋은 친구라카시네요.”

  “뭐라구?”

  “영감땜에 산다구요.”

  내가 엄지손가락을 보이며 얼결에 말했다.

  “허허. 무신 소린지?”

  버갯속 영감은 무덤덤하게 얼굴을 돌렸다. 좋은 친구든 영감 때문에 살든 기분 좋은 말이었다.

  오백 포기나 심어져 있던 배추밭이 고랑만 드러낸 채 썰렁했다. 군데군데 널브러진 시래기 더미가 이른 아침 추위에 을씨년스러웠다. 김장철을 버텨낸 뒤 삭은 이빨처럼 남은 삼십 포기가 끝물이었다. 오늘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얼릉 뽑어봐.”

  영감이 앞질러 허리를 꾸부리며 서둘렀다. 나도 목장갑을 끼고 영감의 옆 고랑을 따라가며 배추를 뽑았다. 된서리를 맞은 배추 잎이 손길에 사각거렸다. 통이 큰 배추는 한 포기 들기도 버거웠다.

  “요새 배춘 뿌리가 없네예. 배추뿌리가 맛있는데...”

  “두고 먹을라머 말이여... 뿌릴 짜르지 말라구. 흙이 붙어 있는 기 좋다니께. 그러구 신문지다 싸서 두라구.”

  버갯속 영감과 나는 동문서답에 이력이 났다. 마땅한 대답이 없어도 좋았다. 제 할 말만 해도 서로 통하고 알아들었다.

  나는 파란 비닐봉지에다 두 포기씩 담아 차까지 부지런히 갖다 날랐다. 어느새 갈 사람들은 다 가고 이젠 세 사람 만 남았다. 버갯속 영감과 할멈 그리고 내가 내뿜는 입김이 도내나루의 찬 공기를 갈랐다.

  배추 담고 있는 나에게 영감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리고 귀에다 속삭였다.

  “요거 가져 가.”

  무언가 두툼한 뭉치를 내 허리춤에 슬쩍 갖다 댔다.

  “아, 예.”

  나는 기어든 소리로 대답하며 엉겁결에 얼른 받았다. 비료부대에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 묵직했다. 두 사람은 서로 쳐다 볼 틈도 없었다. 버갯속 영감과 나는 공범(共犯)으로서 공감대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몇 발 저 만치 서있는 할멈의 시선이 잠간 벗어난 그 틈새였다.

  차에 가서 슬쩍 펴보니 쪽파였다. 배추 밭 옆에는 마침 파밭이 붙어있었다. 영감은 배추를 뽑는 척 하면서 할망구 몰래 파 서리를 한 것이었다.

  조심스레 트렁크에 넣고 되돌아오자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흘끔 할멈의 동정을 살폈다. 다행히 시선이 마주 치지 않았다. 버갯속 영감은 시치미를 떼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영감 곁을 지나며 찔끔 눈인사를 보냈다. 영감도 슬쩍 미소를 흘렸다. 공범끼리 깜짝 작전의 성공을 자축하는 의미였다. 버갯속 영감과 나는 참외 서리하던 개구쟁이 시절에 잠시 젖었다.

  오늘 버갯속 영감이 들쳐 메고 온 양파를 보니 지난해 초겨울 배추밭 우정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계속 연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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