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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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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2 격세지감 2004년에 귀촌, 황토 벽돌에 기와집을 지었다. 년 말 완공 무렵에 첫 눈이 내렸다. 공사판 포크레인이 그대로 보인다. 18년이 지난 오늘도 눈이 내렸다. 마당 왼쪽의 느티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랐다. 기와지붕의 스카이 라인이 감나무와 소나무에 가렸다. 강산이 변했다. 방금 외손녀가 대학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004년생 바로 이 녀석이다. 어느새 18년이 지났다. 청춘의 계절, 프레쉬맨이 되었다. 나는 오늘 치과에 다녀왔다. 충치를 뽑았다. 그동안 애를 맥이던 마지막 사랑니다. 앓던 이 뽑고 나니 시원하다. 그러나 왠지 섭섭하다.
<관촌수필>과 충청도 사투리 이문구 작가는 충청도 한내(대천) 출신이다. 작품집에서 충청도 사투리가 정겹다. 몇몇 작품집 중에 은 특히 충청 내포 토속어가 질탕하다. 몇 번이나 읽으며 오늘도 밑줄을 긋는다. 충청도 사람들 말씨와 행동이 느리다고? 천만의 말씀... 나는 남도 출신으로 어쩌다 이곳 내포 끝자락에 귀촌해 살면서 가끔 속사포 같은 그들만의 대화에 뜻 모를 때 갑갑하기 짝이 없다.
立冬을 지나며... 아, 세월은 잘 간다♪ 언뜻 잠결 창가에 비치는 하얀 달빛이 끝내 새벽잠을 깨운다. 엊저녁 해거름이었다. 이화산 마루에 걸린 석양을 마치 밀어 내기라도 하듯 동천 팔봉산 능선에 보름달이 떴었다. 한로 상강이 지났는가 했더니 하룻밤새 무서리가 내렸다. 입동. 4계절 24 절기는 여측 없이 돌고 돌아 올해 또다시 겨울의 문턱이다. 마음이 바쁘다. 농군의 하루는 짧고 할 일은 많다.
<선김치>의 맛...귀촌의 맛 란 얼렁뚝딱 해서 먹는 김치다. 나물과 김치 중간 쯤인데 끓는 물에 데쳐서 만드는 속성 김치로 주부의 지혜다. 밭에서 무나 배추를 솎을 때 생기는 어린 채소를 버리기가 아깝다. 도회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귀촌의 맛이자 멋.
농부란? 시골 농촌에서 직업이 뭐냐고 묻는다면 어리석다. 농부가 아닌 사람이 있을까? 나는 농부다. 농부의 보람은 땅을 파서 다듬어 심고 가꾸는 일이다. 추수의 기쁨은 다음이다. 올해는 긴 장마로 애를 먹었다. 잡초가 기승을 부렸다. 통제불능이었다. 귀촌 20년에 처음이다. 초봄에 비닐 멀칭을 한 뒤 가을 김장 채소 심을 자리를 비워 두는데 여름을 지나며 고랑 틈새로 완전히 잡초가 뒤덮어 버린 것. 김장 준비는 다가오고... 내 키를 넘는 잡초를 예취기로 걷어내고 멀칭을 해둔 고랑을 괭이로 다시 정리해서 김장배추, 김장무, 알타리무, 쪽파, 대파를 심었다. 보름 걸렸다. 이제 드디어 뿌린 종자들이 뾰쪽뾰쪽 새싹이 되어 올라오고 모종들이 뿌리를 내리며 자리를 잡았다. 가을 햇살에 무럭무럭 자라는 일만 남았다.
알타리무,쪽파 심기...귀촌농부의 김장 풍속도 그저께 대왕무 종자를 넣었다. 어제는 배추모종을 심었다. 오늘은 알타리무 종자를 뿌렸다. 씨 쪽파도 심었다. 김장 준비다. 올해는 철저히 먹을 만큼만 심기로 했다. 해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상 씨앗을 넣을 때면 나도 모르게 양이 불어났다. 나중에 생산량이 남아돌아 나눠주느라고 애를 썼다. 해가 돋는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어제 모종시장에서 배추모종을 살 때 모종아지매가 덤으로 얹혀준 꽃상치도 마저 심었다. 이제 남은 건, 대파 모종을 심는 일만 남았다. 내일 안면도 갔다오는 길에 모종시장을 들러 대파 모종 한 단을 사오면 된다. 넉넉히 밭을 일구어 놨으므로 마음이 든든하다.
귀촌 아무나 하나? 본채와 서재 사이에 너댓 평 짜리 짜투리 밭. 축대 아래 큰 밭으로 멀리 내려가지 않아도 상추, 쑥갓, 대파, 깻잎... 채마 몇 가지는 심어 먹을 수 있어 쓰임새가 있다. 가생이엔 부추밭이다. 일 년에 몇 번이고 잘라주면 새 부추가 돋아난다. 예년에 없던 긴 장마통에 속수무책으로 팽개쳐 놓았더니 온갖 잡초가 제세상인양 쾌재를 부르는 형국이다. 처서를 지나자 아침 저녁으로 이는 찬바람에 비로소 일 할 맛이 난다. 예취기로 잡초를 깔끔하게 잘라내고 부추밭에 퇴비를 부었다. 부추가 자라면 올해 마지막 부추가 될 것이다. 퇴비를 날라오는 길목에 구아바를 무심히 지나칠 수 없어 비대기를 앞두고 영글어 가는 구아바에도 덤뿍 퇴비 거름을...
못난이 채소? 스쳐지나가는 테레비 화면에 '못난이 채소가 인기'라는 말이 얼핏 들렸다. 거들떠보지 않았던 허드레 채소들이 대형 마트까지 진출해 상품으로 제 값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밥상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라 채솟값이 금값이기에 정신이 들었나 보다. 하두 잘 난놈만 설치는 세상에 어정쩡한 녀석도 평가를 받는다니 다행이다. 우리집 채마밭. 귀촌 20년 농부의 내 사전에 못난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