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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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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冬을 지나며... 아, 세월은 잘 간다♪ 언뜻 잠결 창가에 비치는 하얀 달빛이 끝내 새벽잠을 깨운다. 엊저녁 해거름이었다. 이화산 마루에 걸린 석양을 마치 밀어 내기라도 하듯 동천 팔봉산 능선에 보름달이 떴었다. 한로 상강이 지났는가 했더니 하룻밤새 무서리가 내렸다. 입동. 4계절 24 절기는 여측 없이 돌고 돌아 올해 또다시 겨울의 문턱이다. 마음이 바쁘다. 농군의 하루는 짧고 할 일은 많다.
<선김치>의 맛...귀촌의 맛 란 얼렁뚝딱 해서 먹는 김치다. 나물과 김치 중간 쯤인데 끓는 물에 데쳐서 만드는 속성 김치로 주부의 지혜다. 밭에서 무나 배추를 솎을 때 생기는 어린 채소를 버리기가 아깝다. 도회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귀촌의 맛이자 멋.
농부란? 시골 농촌에서 직업이 뭐냐고 묻는다면 어리석다. 농부가 아닌 사람이 있을까? 나는 농부다. 농부의 보람은 땅을 파서 다듬어 심고 가꾸는 일이다. 추수의 기쁨은 다음이다. 올해는 긴 장마로 애를 먹었다. 잡초가 기승을 부렸다. 통제불능이었다. 귀촌 20년에 처음이다. 초봄에 비닐 멀칭을 한 뒤 가을 김장 채소 심을 자리를 비워 두는데 여름을 지나며 고랑 틈새로 완전히 잡초가 뒤덮어 버린 것. 김장 준비는 다가오고... 내 키를 넘는 잡초를 예취기로 걷어내고 멀칭을 해둔 고랑을 괭이로 다시 정리해서 김장배추, 김장무, 알타리무, 쪽파, 대파를 심었다. 보름 걸렸다. 이제 드디어 뿌린 종자들이 뾰쪽뾰쪽 새싹이 되어 올라오고 모종들이 뿌리를 내리며 자리를 잡았다. 가을 햇살에 무럭무럭 자라는 일만 남았다.
알타리무,쪽파 심기...귀촌농부의 김장 풍속도 그저께 대왕무 종자를 넣었다. 어제는 배추모종을 심었다. 오늘은 알타리무 종자를 뿌렸다. 씨 쪽파도 심었다. 김장 준비다. 올해는 철저히 먹을 만큼만 심기로 했다. 해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상 씨앗을 넣을 때면 나도 모르게 양이 불어났다. 나중에 생산량이 남아돌아 나눠주느라고 애를 썼다. 해가 돋는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어제 모종시장에서 배추모종을 살 때 모종아지매가 덤으로 얹혀준 꽃상치도 마저 심었다. 이제 남은 건, 대파 모종을 심는 일만 남았다. 내일 안면도 갔다오는 길에 모종시장을 들러 대파 모종 한 단을 사오면 된다. 넉넉히 밭을 일구어 놨으므로 마음이 든든하다.
귀촌 아무나 하나? 본채와 서재 사이에 너댓 평 짜리 짜투리 밭. 축대 아래 큰 밭으로 멀리 내려가지 않아도 상추, 쑥갓, 대파, 깻잎... 채마 몇 가지는 심어 먹을 수 있어 쓰임새가 있다. 가생이엔 부추밭이다. 일 년에 몇 번이고 잘라주면 새 부추가 돋아난다. 예년에 없던 긴 장마통에 속수무책으로 팽개쳐 놓았더니 온갖 잡초가 제세상인양 쾌재를 부르는 형국이다. 처서를 지나자 아침 저녁으로 이는 찬바람에 비로소 일 할 맛이 난다. 예취기로 잡초를 깔끔하게 잘라내고 부추밭에 퇴비를 부었다. 부추가 자라면 올해 마지막 부추가 될 것이다. 퇴비를 날라오는 길목에 구아바를 무심히 지나칠 수 없어 비대기를 앞두고 영글어 가는 구아바에도 덤뿍 퇴비 거름을...
못난이 채소? 스쳐지나가는 테레비 화면에 '못난이 채소가 인기'라는 말이 얼핏 들렸다. 거들떠보지 않았던 허드레 채소들이 대형 마트까지 진출해 상품으로 제 값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밥상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라 채솟값이 금값이기에 정신이 들었나 보다. 하두 잘 난놈만 설치는 세상에 어정쩡한 녀석도 평가를 받는다니 다행이다. 우리집 채마밭. 귀촌 20년 농부의 내 사전에 못난이는 없다.
귀촌 일기...농부도 출근한다 물병 하나 들고 출근해서 첫 작업은 대체로 물 주는 일이다. 하우 안에 상치, 노지에 봄 배추, 대파 그리고 부추... 그러나 오늘은 자주 양파 밭에 풀 매기. 자주색 양파가 하루가 다르게 영글어 간다. 내일은 마늘밭 김매기다.
올려다보다, 내려다보다 가로림만의 남단, 후미진 도내리 갯마을 이곳에 어느날 외지인으로 들어와서 집을 짓고 정착한 지 17년이 되었다. 추석 명절이 가까워오면 동네 사람들은 마을 들머리에서 안마을까지 길 양쪽의 풀깎이 제초 작업을 했다. 예초기를 든 남정네가 지나가면 아낙네들은 뒤따라 가면서 빗자루로 쓸어 모았다. 수고한다며 반장은 박카스를 한 병씩 돌렸다. 명절 기분이 나기 시작했다. 추석 당일 날은 '어서 오누!' 하며 한 잔하러 빨리 오라는 독촉 전화가 빗발치듯 걸려왔다. 문 반장네 집이나 박 회장집... 아낙네들은 돌아앉아 한 점에 100원 고스톱을 쳤고 남정네들은 주거니 받거니 거나하게 술판이 벌어졌다. 반상회는 옛말. 4, 5년 전부터 풍속도가 확 달라졌다. 한적하기만 했던 산천이 이젠 의구하지도 않거니와 물도 옛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