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0세의 팡세

8평에서 45평...국회의원 회관 변천사

 

 

 

1971년, 나의 첫 직장은 세운상가에 있는 국회의원 회관이었다. 그 해  4.27  7대 대통령 선거와 5.25  8대 국회의원 선거가 연달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경남 진주 진양을 선거구로 하는 국회의원 후보자의 선거운동에 참여했는데 당선 직후 서울로 올라와 비서로 근무하게 되었다. 국회 사무처 소속 공무원이 된 것이다. 

 

사무실은 국회의원  204명에게 배정된 8평 짜리 였다. 통칭 '세운상가' 라지만, 을지로와 퇴계로 대한극장 사이는 풍전상가, 신성상가, 진양상가 건물로 이름 지었다. 5개 층을 빌어 1968년 7월, 국회의원 회관으로 개관했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20년만에 마련된 우리나라 첫 국회의원 합동 사무실이었다. 

 

청계천 고가도로 건설, 여의도 윤중제 공사와 더불어 세운상가는 당시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의 시정 역점사업으로  종로 3가, 청계천과 을지로를 지나 충무로 퇴계로까지 남북으로 무허가 판자촌을 헐어내고 주상복합 건물 지구로 재개발한 수도 서울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세운상가 의원회관은 애당초 주거공간도 아니었고 오피스텔도 아니었다. 두부 자르듯 칸막이를 해서 길다랗게 생긴 사무실 내부는 어두웠고 건물 가운데 통로는 담배 연기에 쩔여 환기가 되지 않았다. 화장실도 멀었다. 이런 사무실을 두고 초호화판이라는 비난이 폭주했다.

 

국회의원 비서로 첫 임무는 당선 사례 인사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하루에 3십여 통을 지역구 유력 인사들에게 손 편지를 정성들여 일일이 직접 써서 우편으로 보냈다. 

태평로 국회의사당( 현 서울시의회 의사당)을 오가는 불편이 뒤따랐다. 그 해 성탄절날 발생한 대연각 호텔 화재 참사를 바로 지척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최근 들리는 바에 의하면 세운상가를 '초고층' 건물지구로 다시 재개발한다고 한다. 김현옥 시장 이후 50년만에 재재개발이다. 세운상가라는 말만 들어도 50년 전 추억에 만감이 교차된다. 도떼기 시장 같았던 사무실 입구 풍전다방은 만남의 장소였다.)

 

 

 

1972년, 조선일보사가 현재 코리아나 빌딩을 태평로 국회의사당 옆에 준공되었다.  그 때만해도 고층빌딩 수요가 없어 그 해 7월, 11층부터 몇개 층을 빌어 의원회관을 옮겼다. 중진 의원일수록 저층에 배정되었고 평수도 10평 내외로 호실의 크기에 따라 차등화했다.

 

10월 17일 게엄령이 선포되어 장갑차가 진주하는 태평로 거리를 내려다 보며  ' 10월 유신 '의 그 날을 목격했다. 8대 국회가 해산되면서 이사를 한 지 석 달 만에 코리아나 빌딩의 국회의원 회관은 폐쇄되었다.

 

마침 겨울로 접어든 데다 정치의 계절은 얼어붙었다. 국회의원들은 집도 절도 없이 또다시 각자도생이었다. 덕수궁 대한문 옆에 어느 빌딩에 임시 사무실을 마련해 출근했다. 그해 11월 유신헌법안은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1966년, 김현옥 서울시장이 밀어붙인 또 하나의 역점은 여의도 개발과 윤중제 건설. 1969년 여의도 서쪽 양말산에 터를 잡아 기공한 국회의사당이 1975년 9월 준공되었다. 여의도 80만 평 허허벌판에 건물이라고는 국회의사당과 동아일보 별관 그리고 주공 시범아파트 뿐이었다.

 

그 즈음에 의사당 앞 간선 도로 건너편에 한양주택과 라이프 주택에서 5층짜리 소형 아파트를 몇 개 동을 지었다. (현, KBS 별관)  특혜 시비 등, 이런저런 곡절 끝에 국회 사무처가 인수해서 리모델링 공사를 한 뒤 국회 의원 210명에게 회관 사무실로 배정되었다. 비로소 국회가 주인인 국회의원 사무실이 마련된 것이다. 

 

1976년 3월 내가 모셨던 분이 6선 의원으로 9대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나는 1979년 5월, 국회를 떠날 때까지 3년 동안 국회의사당 본관 2층 부의장실에서 근무하였다. 민간 아파트를 인수해 배정된 의원사무실은 사무처에 반납했으므로 내가 이 사무실에 출입한 적은 없다. 

 

 

 

 

당시, 생존하셨던 고령의 제헌의회 의원들이 부의장실에 자주 들렀다. 국회 부의장이 원로 전직의원들의 소통 창구 역할을 맡아 있었기 때문이다. 제헌의원들의 체구는 자그맣고 깡말라도 우국지사의 풍모가 물씬 풍겼다.

 

 

1977년 제헌절을 앞두고 최범술 제헌의원이 주신 글을 간직하고 있다.  雖無切能應機說話猶如天鼓  ... '할 말이 있을 때는 망서리지 말고  벼락치듯이 깨우쳐 주는게 도리이니라... '

 

 

경기도 안성 출신 김영기 제헌의원이 친목단체인  '제헌동지회' 총무를 맡고 계셨는데 평소 과묵하셨던 분이 어느 날인가, '국회의원들의 질이 갈수록 떨어진다.' 는 요지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21대 국회의원 회관의 사무실이 지금 45 평이라던가?  지금까지 나는 현재 국회의원 회관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  8평에서 45평으로, 3명에서 10명으로 늘어난 보좌진들. 모두 국민 세금이다.)

 

 

자충수로 스스로 희화화 되는 국회의원들... ...  제헌의원 원로들이 오늘날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치판 면면을 보시면 어떤 말씀을 하실까?  그런데 터가 세서 여의도 의사당을 세종시로 옮긴다고? 국회가 괴나리 봇짐인가.  그럼 국회의원 회관은? 

 

 

 

 

 

 

 

'70세의 팡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 시민으로 산다는 것  (2) 2022.09.22
감동한다는 것  (0) 2022.08.11
노부부 그리고 '아내와 나 사이'  (0) 2022.08.02
바람 부는대로... 물결 치는대로...  (0) 2022.07.09
잡초 본색  (0) 2022.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