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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무 아리랑

LG 93-98 김상무 아리랑(44화-1) "내한테 오지마!"

 

44-1

 

 

“ 내한테 오지마! ”

 

문을 열고 두어 걸음 들어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책상에 앉아있던 김회수 사장이 고함을 치면서 손에 쥐고 있던 펜을 그대로 책상을 내려찍었다. 박살이 났다. 만년필이었다. 김 사장의 눈에는 불이 일었다.

나는 들어가던 걸음을 그 자리에 멈추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기상도는 며칠 전부터 감지되었다. 막상 이 지경이 되자 나는 멍청해졌다.

 

“ 도와주는 게 뭐가 있어? 너들은. ”

고함소리가 더 커졌다.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무언가 날아올 것 만 같아 온 신경이 김 사장의 손에 집중이 되었다. 그러나 던지진 않았다.

“ ................. ”

설명 자료를 한 손에 든 채 출입문에 어정쩡하게 선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오늘 이 사태는 <중복사업의 통합작업>과 <네고 플랜>의 후유증이었다. 에이플랜을 이끌어 가는 내 입장에서 중립을 지킬 일이 따로 있었다. < 네고 플랜 >에서 내 견해는 이희종 CU장 쪽이었다. 그리고 에이플랜 팀장으로서 CU장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정쩡한 태도는 일정을 지연시키고 페이퍼 워킹 만 늘어날 뿐이다.

비관적인 사람은 장점에 둔감하고 단점에 민감할 뿐, 장단점의 이해득실은 마음만 열면 백지 한 장 차이다. 시간이 마냥 있는 게 아니다. 단안이었다. 최종 결정은 CU장의 몫이다.

 

“ 이희종이 하고 해. 내한테 뭐 하러 오는 거야? ”

경칭이 생략된 CU장 거명은 의외였다. 김 사장은 무언가 작심을 하고 나선듯 했다.

“ ................ ”

진퇴양난이었다.

“ ..... 내한테 오지 마. ”

김 사장의 고함과 함께 이번에는 손으로 책상을 다시 내리쳤다. 서류 몇 장이 날려서 바닥에 딩굴었다. 김 사장의 목소리는 사장실 바깥으로 새어나와 23층 기전 사무실에 울려퍼졌다. 최후통첩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선채 냉정을 찾았다. 나는 가벼운 목례를 한 다음 물러나왔다. 기전 사장실이 있는 23층에서 에이플랜 팀이 있는 24층의 내 자리로 돌아왔다. 손에 들고 있던 튜닝 자료를 책상 위에 소리가 나도록 던졌다. 허탈했다. 

비서 김희장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물 한잔을 두고 나갔다. 내가 자리로 돌아오기도 전에 비서는 한 층 아래서 조금 전에 일어난 소동을 알았다. 임원들의 심기 정보를 실시간으로 교환하는 비서들만의 네트워크가 가동되었던 것이다.

 

에이플랜 팀 멤버들 중에 어느 누구도 내 앞에 얼른거리지 않았다. 개미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강산이었다. 기전 사장에게 호되게 당하고 온 팀장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로 생각했음인 가. 여느 때 같으면 전화나 대화로 떠들썩할 시간이었다.

 

‘좋은 경험을 했어.’

나는 혼자 삭였다.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팀 멤버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몇 명이 책상 앞에 엎드려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보자 눈치를 살폈다. 에이플랜 팀에서 이렇게 주눅이 든 분위기는 처음이다. 거리낌이 없는 분방함이 우리의 자랑이었다.

 

“ 오늘 어땠어요? ”

윤용호였다. 슬며시 고개를 들고 능청스럽게 물었다. 평소 밑도 끝도 없이 잘 부딪치며 눙치는 이런 친구들이 편했다.

“ 잘 끝났어. 격려를 받았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 예? ”

“ 구름을 뚫고 조금 만 올라가 봐. 비행기 타고... 올라가면 거긴 대명천지야. ”

“ .................. ”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않았다. 내가 김 사장 방을 나오기도 전에 산전CU의 트윈빌딩 서관에는 오늘 소동에 대해 대단한 뉴스거리로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 

“ 우린 우리 할 일만 잘하면 돼. ”

 

 

 

 

 

 

 

‘ 이희종이 하고 해. ‘

평소 CU장에게 곰살스러웠던 김 사장의 이 한마디는 나에게 충격이었다. 이희종 CU장에 대한 배은망덕이었다. 

 

무엇보다도 에이플랜의 프로세스와 작업 분위기가 헝클어진 게 문제였다. 중복사업 관련 정식 보고회를 앞두고 상정되는 에이플랜 팀 안의 줄거리를 사장들에게 사전에 설명하고 상충되는 의견을 수렴해서 조율하는 프로세스 자체가 뒤틀어져 버렸다. 매킨지가 그토록 강조했던 프로젝트 추진 과정에 빼놓을 수 없는 실무적인 프로세스였다.

 

아니나 다를까 매킨지의 후지모토도 난감한 일로 받아들였다. 나를 볼 때마다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큰 눈방울만 굴릴 뿐이었다. 컨센서스와 모니터를 중시하는 그들의 낭패감을 나는 옆에서 온 몸으로 읽었다.

그럴수록 나는 매킨지 친구들에게 창피스러웠다. 트윈타워 서관 23층의 기전 사장실은 나를 비롯한 에이플랜 팀에게 출입금지 구역이 되었다. 이후 에이플랜 관련 보고회에서 김 사장은 노 코멘트로 일관했다.

 

 

기전의 김 사장은 엘리베이터 사업은 물론, PLC, 송배전기기 사업을 한 세트로 하여 미쓰비시로 파트너십을 가져가자는 일념이다. 향후 산전 CU의 사업 전반에서 미쓰비시를 위주로 히타치나 후지전기에서 탈피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여러번 했는데도 에이플랜 팀에서 귀담아듣지 않는다고 지난 주 네고플랜 관련 면담에서 후지모토와 나에게 화를 냈었다. 심지어는 에이플랜 팀 구성원에 계전 출신들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냐는 뜻밖의 불만까지 토로했다.

 

그러나 이희종 CU장이 주관하는 '에이플랜 스티어링 컴미티'에서 김 사장 스스로 솔직하게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 이희종 CU장은 PLC나 그 밖의 사업은 미쓰비시나 후지전기가 제시하는 조건 등 추이를 보아가며 협력관계를 유지한다는 유연한 입장인 반면에, 엘리베이터 사업에 있어서는 히타치 쪽으로 워낙 소신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김 사장과 나 사이에 걸쳐있는 갈등은 어디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사과하면서 풀어야 할 성질도 아니라는 사실에 매킨지의 후지모토도 골머리를 싸맸다. 끝내 이희종 CU장과 김회수 사장이 머리를 맞대고 탑이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44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