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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무 아리랑

LG 93-98 김상무 아리랑(44화-3) "들었어요? 김 이사!"

 

44-3

 

 

저녁 회식장소는 초가장이라는 횟집이었다. 제주에서 다금바리를 잘한다는 소문이 나있었다. 일상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표정들은 느긋했다. 탈 서울, 출 트윈빌딩은 좋은 아이디어였다는 칭찬을 귀 뒤로 들으며 나도 횟집 문을 들어섰다. 모두 17명.

 

“ 김 이사. 오늘 고생했는데 가운데로 앉어! ”

 

권태웅 하니웰 사장이 내 손목을 잡아 이희종 CU장 옆에 눌러앉혔다. CU장도 턱을 두어 번 끄덕이며 그렇게 하라는 시늉을 했다. 여느 회의가 다 그러했지만 오늘 워크샵에서도 숙제가 많이 떨어졌다. 권 사장의 한마디가 무거운 마음을 가쁜하게 해주었다.

 

서로 마주앉은 긴 줄에 좌석 배치는 사장들이 외곽에 포진한 형국이 되었다. 애연파를 빙자하여 문 가 쪽으로 빠지려는 몇 사람이 있었다. 서정균 전무와 이중칠 전무가 사장들의 시야에서 가급적 벗어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중앙에 자리한 이희종 CU장도 골초여서 담배 냄새 여부로 앉을 자리를 가릴 계제는 아니었다.

 

2월의 제주항 밤바다는 캄캄해졌다. 뱃고동 소리는 이미 멎었다. 열어논 창문으로 해풍이 밀치고 들어와 자욱한 담배연기를 희석시켰다. 인근 제주공항에서 뜨고 내리는 밤비행기 불빛이 스쳐 지나갔다. 

진로가 아닌 한라산 소주 탓인가. 취기가 올랐다. 돌아가는 술잔들이 날렵했다. 일상에서 벗어난 해방감이었다. 산발적으로 왁자하게 웃음이 일었다.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쫒기듯 다섯 시간동안 워크샵에 매달렸다. 여의도 트윈빌딩 회의실에서 미진함을 보상이라도 하듯 자유분방한 토의였다. 매킨지가 자리에 없다는 홀가분함이 토의를 활성화하는데 일조를 했음인가.

이희종 CU장은 묘목론을 말했다. 신 사업의 발굴도 긴요하지만 기존의 사업을 가지치기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요지였다. 

 

 

 

산전의 목표 즉, <산전CU 장래상>과 <사업영역에 대한 토의>는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44화-2에 게재된 회의록과 함께 모두 아홉 장으로 이렇게 요약 정리되었다. 

 

 

 

 

 

 

 

 

“ 백 사장! 난, 당신, 육사 나온 줄 알았어! ”

 

이희종 CU장이 두 사람 건너서 앉아있는 백중영 사장한테 던진 말이었다.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큰 목소리에 시선이 CU장 쪽으로 쏠렸다. 떠들썩하던 끼리끼리의 대화가 잦아졌다.

백 사장은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면서 대답할 준비 자세를 취했다. 곤혹스러움이 비쳤으나 두어 번상체를 흔들어 무게를 잡았다.

“ 전 그런 말 한 적이 없습니다... 본래 대전고는 군 출신이 많습니다. ”

백 사장이 머뭇거리며 말을 받았다.

 

이희종 CU장이나 백중영 사장이나 알콜에 얼굴이 빨리 빨개지는 타입이어서 얼굴만으로 소주를 얼마나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앉은 자리 주변에서 첨잔까지 겹쳐 초장에 많은 술잔을 받았을 것이다.

“ 늘 0 00하고 같이 논다고 하두 많이 들어서..... ”

CU장이 거침없이 말했다. 0 00는 청와대 경호실장이었다. 말머리가 어느 곳으로 튈지 아슬아슬했다.

 

 

나는 3년 전에 있었던 CU장의 ‘와까레 ’를 상기하며 머리끝이 쭈뼛하게 섰다. 두 분의 대화가 아슬아슬했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헤어짐과 만남이라는 동전의 양면. 여반장. 조직이란 그런 곳이다. 산전CU에서 두 분은 말이 씨가 되어 그렇게 헤어지고 또다른 인연으로 그렇게 또 다시 만나 오늘 제주에까지 온 것이다.

 

“ ..................... ”

백 사장은 대답 대신 주위의 분위기를 살폈다. 백 사장 시선으로 보아 굳이 대응을 하지 않을 참이었다.

“ 누가 그런 소문을 냈나? ”

CU장이 말했다. 

“ 제 머리 모양이 군 출신 같이 보여서 그렇겠지요.... 다들 잘못 알고 있습니다. ”

이런 상황이 처음이 아닌듯 백 사장다운 처신으로 그렇고 그렇게 받아넘겼다.

 

“ 육사를 팔고 다닌 거 아니요? ”

이희종 CU장도 백 사장이 육사 출신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니다. 언중유골이었다. 아슬아슬한 대화에 모두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누구도 섣불리 끼어들 수 없었다. 에이플랜 팀 부장들은 끄트머리에 앉아있다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두 분의 대화는 곧 소강상태를 이루었다. 좌중을 긴장시켰던 오 분여 태풍이 지나갔다. 소주잔들이 서서히 재가동되었다. 나도 찾아온 안도감으로 이미 따라져 있던 소주잔을 비웠다. 그리고 권했다.

왜 이런 대화가 이 자리에서 갑자기 나왔을 가. 나의 의문이었다. 

 

 

두어 시간이 지났다. 권태웅 사장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싸인을 계속 나에게 보냈다. 나더러 파장을 선언하라는 뜻이었다.

 

 

 

 

초가장의 저녁 회식에서 호텔로 돌아온 일행은 프런트에서 키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엘리베이터로 이희종 CU장이 방으로 먼저 올라가자 김회수 사장도 뒤따라 가버렸다. 내일 새벽의 골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 김 이사! 그냥 올라가도 돼? ”

반어적인 어투의 박충헌 전무였다. 

“ 제주까지 와서 재미없게 말야... 방으로 올라가버리구.”

이중칠 전무도 바람을 잡는 박 전무에 뒤질새라 맞장구치며 거들었다.

“ 한번 만들어 봐. 너무 일찍 끝났어. ”

구자욱 전무가 슬쩍 눈짓을 하며 나를 재촉했다. 

 

저 쪽에는 백 사장과 권 사장이 방으로 올라갈 채비를 하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바빠졌다. 이리저리 뛰며 일행을 다시 불러모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호텔 건너편의 단란주점으로 몰려갔다. 이희종 CU장과 김회수 사장만 빠졌다.

 

 

 

“ 어른들이 다들 왜 그래요? ”

이중칠 전무가 자리에 앉자마자 초가장에서 벌어진 육사 논쟁을 환기시키며 백 사장을 향해 쏘아붙였다. 

“ 아니, 난 가만히 있었어. 그 어른께서 못마땅하신 게 있었던 가봐. ”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백 사장이 말했다. 

“ 그 양반은 나를 아직 신입사원으로 보고 있단 말이야. ”

이 전무가 투덜거렸다. 이 전무는 이 전무대로 낮에 있었던 CU장의 퇴박이 새삼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 아니 좀 있다 나오시지, 왜 그리 빨리 튀어나와요. 홑이불에 뭐 나오듯... ”

구정길 전무가 정색을 하며 이 전무를 자극했다.

 

“ 나라도 나와지... 그럼 나 이젠 가만 있을 게, 이제부텀 당신이 좀 튀어 나와 봐. ”

이 전무가 구 전무를 쏘아붙였다.

“ 어이구, 잘못되었습니다. 형님. ”

구 전무가 납작 엎드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 가만히 있으면 가운데나 갈텐데. 괜시리 틔어 나와 가지고... ”

옆에 있던 권태웅 사장이 즉시에 써먹었다. 그러자 웃음이 터졌다.

“ 그런데 요즘엔 영 튀어나오질 않아. ”

권 사장이 능청스레 말했다.

 

“ 이래라 저래라... 에이플랜이 힘들게 해서 그래. ”

이 전무가 호응을 했다. 다시 한번 웃었다.

 

 

“ 들었어요? 김 이사. 멀리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때 선물 하나는 쥐어주어야 할 것 아니요? ”

허창수 부사장이 약간 더듬는 말투로 말을 받았다.

“그래, 맞어! 그냥 빈손으로야. 에이플랜에서 다 생각이 있을끼구마.”

구정길 전무가 넘겨짚으며 앞질러 나갔다.

 

“힘 쓰는데 뭐가 좋을지 알아보겠습니다. 내일 아침나절에 준비할 시간이 있읍니다.”

 

 

에이플랜이 힘들게 한다는 아우성이 나올 만도 했다. 어제도 에이플랜 팀이 주관하는 <품질향상 연락회의>가 CU장 주재로 늦게까지 있었다.

매주 한두 번 꼴로 에이플랜 팀이 소집하는 보고회가 줄줄이 계속되는 싯점이었다. 지금까지 안해본 패턴의 일들이란 항상 스트레스를 동반했다. 

 

 

 

 

 

 

이 사이에 박 전무가 먼저 무대 앞으로 나가 반짝이 조명 아래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두 해프닝이 있었다. 첫 라운드는 워크샵의 과정이었고 두 번째는 초가장 식사시간이었다. 이어지는 노래에 묻혀 시간은 어느듯 내일을 향해 가고 있었다. (44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