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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무 아리랑

LG 93-98 김상무 아리랑(44화-4) 김 사장은 옷을 벗었다

44-4

 

 

서울로 돌아오는 김포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제주공항에서 이희종 CU장을 비롯해 워크샵 참석자 일행에게 옥돔을 나누어 주었다. 허창수 부사장이 제안한 아이디어가 현실화 된 것이다.

품목을 뭘로 선정하느냐부터 수산물 센터를 찾아 제주 기념 선물을 급히 준비하느라 오전내내 에이플랜팀 친구들이 바쁜 걸음을 쳤다. 제주 특산품 말린 옥돔이라는 말에 다들 좋아했다.

 

“ 달랑 한 마리 주는 게 어딨어요? ”

 

“ 줄려면 제대로 주어야 힘을 쓰지!... ”

 

제주에서 돌아온 다음날 전화통으로 나에게 날아든 반응이었다. 

 

“ 에이플랜 하더니 김 이사가 되게 짜졌어. ”

농반진반으로 허 부사장도 나를 보자 대뜸 말했다.

 

일행에게 나누어준 말린 옥돔은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딱 한 마리씩이었다. 강명철이 준비를 하면서 너무 ‘짜게’ 집행한 결과였다. 강명철은 제주가 고향이어서 옥돔이 귀하다는 걸 잘 알았다. 나는 옥돔에 관한 상식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에이플랜팀의 서브 리더인 박진홍은 제주 워크샵 결과를 궁금해하는 매킨지의 후지모토에게 토의 내용을 석 장으로 요약하여 전해 주었다. 

 

강명철은 '금성산전' 사보 기자에게 제주도 워크샵 내용을 이렇게 정리해 주었노라고 나에게 원고를 보여주었다. 며칠 뒤 그대로 기사화 되었다. 

 

“ 사업활성화 팀 최고 경영층 워크샵 개최

산전CU 미래상과 최고 경영층의 역할에 대해 토의

 

지난 2월 19일, 21일 산전CU의 비전 논의를 위한 최고 경영층의 워크샵을 개최하였다. 경영회의 멤버 전원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는 산전의 미래상, 지향해야 할 방향 그리고 최고 경영층의 역할에 대한 허심탄회한 논의가 있었다.

활발한 토의를 통해 향후 사업 전개에 대한 컨센서스를 이루었으며 최고 경영층이 리더십을 발휘하여 신생 산전CU의 새 모습을 창조하기로 다짐하였다. “

 

 

 

 

‘내한테 오지마!’, ‘이희종이 하고 해!‘.

 

 

김회수 사장의 행보는 변함이 없었다. 에이플랜 과정의 한 단계인 <네고 플랜 (Nego Plan)>의 후유증은 길었다. 나도 피곤했고 매킨지의 아카바와 후지모토도 어디서 풀어야 할지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 했다. 그럴수록 난처했다.

 

Nego란 Negotiation의 약자다. 산전CU 3사는 각각 일본의 히타치, 후지덴끼, 미쓰비시 등 자본과 기술을 동반한 해외 합작선이 있었다. 해외 합작선은 에이플랜에서 추진하는 산전, 계전, 기전의 3사 통합에 중요한 변수였다.

이들이 어떻게 나올지에 따라 3사 통합의 그림이 달라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PLC, 송배전기기 사업에 대해 산전의 입장에서 이들 합작선을 어떻게 다루어 나가야 할 지 대응책을 수립하는 일을 <네고 플랜>이라 명명했다. 실제 교섭에 대비하여 사전 도상훈련이었다.

 

특히 엘리베이터에서 사업의 자립도나 제품의 개발, 수출의 자유도 면에서 히타치와 미쓰비시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희종 CU장과 김회수 사장은 정 반대였다. 

 

 

 

 

94년 새해가 되자 <네고 플랜>의 프로세스에 따라 이희종 CU장, 백중영 계전사장, 성기설 산전 부사장, 각 사업본부장, 관련 사업부장, 그리고 연구소장의 개별 면담이 차례로 이어졌다.

 

김 사장의 면담에 후지모토와 함께 들어갔다. 나나 매킨지의 후지모토나 이심전심으로 김 사장의 면담은 다른 사장들 보다 비중이 컸다. 면담 내내 후지모토는 검은 굵은 안경테 안으로 큰 눈방울을 굴리며 시종 열심히 메모했다.

 

 

 

연쇄 면담 결과를 토대로 만든 에이플랜 작업 내용이 김회수 사장으로선 불만이었다. 미쓰비시를 옹호하는 자신의 견해는 무시되고 히타치를 축을 하는 이희종 CU장의 의지만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내한테 오지마!’, ‘이희종이 하고 해!‘. 고함소리와 함께 쥐고 있던 만년필로 책상을 내려찍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 싯점이 시발이었다.

 

 

트윈빌딩 동관에 있는 회장실의 남용 상무가 V-추진본부장으로서 산전 3사 통합작업을 관장하고 있었다. 에이플랜 팀과 작업 중인 매킨지나 V-추진본부 팀원들이 에이플랜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사건건 실시간으로 전달되었다.

 

 

그룹 회장실의 탑 매니지먼트도 정황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는 건 불문가지였다. 산전만의 비밀은 없었을 뿐 아니라 유지되지도 않았다. 

 

 

회장실에서 몇 가지 움직임이 간헐적으로 흘러 나왔다. 김회수 사장의 평소 워킹 스타일을 알아보고 통합작업에 임하는 김 사장의 참여도를 모니터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드디어 그룹 회장실의 변규칠 부회장이 김 사장을 별도로 불러 주의를 주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변 부회장은 사전에 이희종 CU장에게 전화를 걸어 몇 가지 사항을 확인했다는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내 귀에 들어왔다.

 

 

‘김 사장이 회장실에 찍혔다.’

며칠 뒤 이 말까지 들렸다. 산전CU 4사에 퍼져나갔다. 그동안 가려져 있던 김 사장에 대한 업무 스타일이나 개인적인 성격을 들추어 새삼스레 화제에 올렸다. 김회수 사장의 성품이나 성향에 대한 자질구레한 모든 것들이 발가벗겨졌다.

 

골프할 때 김 사장의 일화도 다시 소환되어 재탕되었다. 플레이가 잘 풀리지 않을 때 김 사장은 골프채를 던지거나 티 업 마크를 내리쳐 박살을 내기도 했다. 심지어는 외부 인사를 초청한 날도 이 버릇 때문에 동반자를 당황하게 만들어 다신 같이 골프를 안하겠다고 선언했다는 일화가 있었다. 

 

골프 매너로 계전의 백중영 사장과 김 사장을 비교하곤 했다. 동반자를 배려해 ‘가라 스윙(연습 스윙)’이 없고 플레이 속도가 빨라 백 사장은 그린의 신사라 불릴 만 하다는 내용이었다.

 

‘가라 스윙’을 안하는 이유를, 구자경 회장과 플레이를 할 때 '그 어른이 가라 스윙을 안하시는데 젊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느냐?'며 연습 스윙을 못하는 이유로 빗대 설명하곤 했다. 골프 뿐 만 아니라 백 사장 특유의 매너 강의는 워낙 다채로운데다 기발나서 한번쯤 들어둘 만 했다. 

 

 

 

 

급기야 ‘김회수 사장이 회장실에 불려갔다.’는 말이 들렸다. 치명적인 직격탄이었다. 95년도로 예정된 에이플랜의 3사 통합 작업이후 이희종 CU장의 후계자로는 김회수니 하는 말이 정설로 굳어질 때였으므로 일으키는 파장은 컸다.

 

임원들끼리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삼삼오오 둘러앉아서 뒷 담화의 주제로 삼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산전CU에서 김회수 사장의 생사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 이르렀다.

년말에 이르면 정기 사장단 인사에서 김 사장의 낙마는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로 일찌감치 점쳐졌다. 

 

 

 

1993.2 어느 모임에서 김회수 사장(右)과 함께

 

 

 

어느 날 인터폰으로 바꿔주는 비서 김희장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 김회수 사장님이예요. “

 

김 사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점심 시간이 임박할 무렵이었다.

비서가 더 놀랐다. 몇달째 이어져 온 난기류를 비서가 모를 리 없었다. 비서의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나는 잠시 엉거주춤하다 키를 눌렀다.

 

“ 점심 같이 가지. 별 약속 없으모... ”

김 사장의 느릿한 경상도 사투리 저음이 흘러나왔다. 

 

“ 아, 예. 그러시죠. ”

내 목소리가 흔들렸다.

 

천지가 개벽을 할 일이었다.

트윈빌딩 서관 현관에 나가니 김 사장이 일행을 기다리며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희종 CU장과 박충헌 전무가 잇달아 내려왔다.

 

네 사람의 행선지는 밤섬 맞은 편 마포 용강동에 있는 어떤 허름한 중국집이었다.

“ 집은 이래도 맛은 좋아. 한번 먹어봐. ”

 

문을 들어서며 김 사장이 사근박지게 내게 말했다.

김 사장 바로 옆자리에 내가 앉았다.

 

 

‘ 드디어 해빙이 되었구나! ’

 

식사도 하는둥 마는둥 오로지 나는 이 생각뿐이었다. 지난 몇 달의 악몽에 주문한 몇 가지 코스 요리가 맛이 있는지 없는지 비몽사몽 헤맸다.

 

오늘 김회수 사장과의 점심 식사의 자초지종도 사내외를 퍼져나갔다. 임원들이나 관리자들 사이에서 화제의 중심 테마가 되었다. 에이플랜에 대한 김 사장의 해빙은 사내의 중대 뉴스였다. 매킨지도 반색해 마지않았다. 에이플랜팀 맴버들도 먹구름이 걷힌듯 활짝 웃었다.

 

 

 

작년 년말 <네고 플랜>의 시작 단계부터 다섯 달 동안이었다. 기세등등했던 예전의 모습은 사라졌다. 에이플랜 보고 때 침묵으로 일관했던 김 사장이었다. 에이플랜 보고회에서 말문이 터져 발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에이플랜 팀에 대한 칭찬도 곁들였다.

 

통합 작업의 과정에 빚어졌던 ‘ 나한테 오지마! ’의 해프닝은 외관상 일단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산전CU에 한번 드리워진 후유증은 심각했다. 이미 늦었다.

 

 

지금까지의 대권 구도에 전혀 다른 변수를 불러올 조짐이었다. 년말이 가까워올수록 회장실이 있는 트윈빌딩 동관에서 들려오는 풍문이 현실로 나타났다. 그런 면에서 1994년은 우중충한 한 해였다.

 

 

 

연말 어느 날 <금성 전자부품> 이종수 사장이 트윈빌딩 서관 23층 산전CU에 나타났다. 94년 년말의 그룹 사장단 인사에서 김회수 금성기전 사장이 전자CU의 <금성전자부품> 사장으로 가고 이종수 <금성전자부품> 사장이 '금성기전 사장 겸 산전의 부사장'으로 발표되었다. 서로 맞바꿨다. 이희종 CU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산전CU의 지난 3 년여 흐름으로 보면 대권의 중심이 백중영 사장에서 김회수 사장으로 갔다가 백 사장과 김 사장의 혼전을 거쳐 제 3의 인물이 등장했다. 산전에는 왜 인물이 없을까? 이런 의문을 남기며 김회수 사장과 맞딱뜨렸던 터널의 끝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이후, 김회수 사장은 전자부품에서 한 해 뒤 옷을 벗었다. 반면에 이종수 기전 사장이 이희종 CU장의 뒤를 잇자 백중영 계전 사장도 그해 신생 3사통합 산전의 발족에 맞추어 자리를 물러났다. (44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