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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일기- 70살 부부의 라오스 자유여행기






오늘은

블로그와 만난지 4.277일에

게시글 4.000번째 날이다.


10여 년 세월에 하루에 한번

글을 쓴 셈이다.


얼마 전에 갔다온 

 '70살 부부의 라오스 여행기'는

뭔가를 자축하는 의미에서

써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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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세상이다.


집사람은

아이들이 걱정한다며

가는 곳 마다 실시간으로

현장을 중계하듯이

카톡에 올렸다.








































































11박 13일 이번 여행지는

라오스 중부였다.


수도 비엥티안에서 이틀 밤.

옛 도시 루앙프라방에서 닷새 밤.

방비엥에서 사흘 밤.

남릉호수에서 하루.


비엥티안에서 프로펠라 국내선으로

옛 도시 루앙으로 날아가서

밴 자동차를 빌려 천천히 

돌아오는 코스였다.






온통 소금을 뿌린듯 메밀꽃 같은

구릉지대 산야도 만났고,

끝없는 고갯길 천길 낭떠러지가 

구비구비 발 아래

안개 속에 떠있기도 했다.


발걸음 닿는 어디든 머물고

때가 되면 먹고.


자유여행의 묘미는

맛딱뜨리는 그대로

즐기면 되는 것.








이게 웬 일.

라오스를 뒤덮고 있는 스모그.

 

중국발 미세먼진 줄 알았더니 

건기에서 우기로 가기 길목에

화전민들이 태우는 연기란다.


우리도 이랬다.

화전민... 하면 강원도가  

생각났다.


라오스는 8할이 산이다.







비슷한 문자, 톡톡 틔는 말투.

어느 나라 방송인지 알 수 없었다.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중국 등 

1백 개는 됨 직한 TV 채널이  

어지럽게 잡히는 라오스.

 

동남아 중심이면서 바다가 없는

육지의 섬나라였다.


지정학적으로 외세와 전란이 

빈번했다.


앙코르 와트 같은 문화유적이

몇 곳은 있어도 있을 나라에 

깨어진 불상 잔재된 흔적만

도처에 남아 있다. 


태국에 빼앗긴 에머랄드 불상 대신

모조품을 앞에 놓고 란쌍 왕조의  

영화를 재현해  나그네도 

심란하기는 마찬가지. 


나라의 존망,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들리는 듯 백성의 원성.

비애가 도처에 서렸다.






























어딜 가든

멀리 닭 우는 소리 들리고

순둥이 개들이 무시로

오가는 거리.


길가에는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조무래기 아이들 천지.

둘 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는 없었다.










언제 깐 아스팔튼지 이리 팽기고

저리 뭉개져 흙먼지가 풀풀 나도  

인류 문명의 미세먼지에는

오염되지 않았다.


현대판 실크로드 일대일로 기치 아래

중국 자본이 흘러든 듯

중장비로 파헤쳐지고 있는게

한편 허탈했다.


Lao PDR의 한계는 어쩔 수 없다.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나는 듯

우리 5, 60년대의 수준이다.


가는 곳마다

60년 전 그 시절 내 고향

진주를 생각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란 숫자로

삶의 질을 평하는 건

배웠다 하는 식자의

편견이다.


왁자한 라오스의 새벽시장은 

풍요로웠다. 

야시장의 찬란한 불빛처럼

표정도 밝았다.


과객에겐 한갓 구경거리지만

현지인에겐 치열한 삶의 현장.


정겹고 편안했다.

라오스는 순수 순박

순후했다.









수많은 사찰에서

어둠을 뚫고 쏟아져 나오는 스님들에게

공양하는 걸로 하루를 여는 탁발.


신라의 화랑이 이랬을 가.

한달이건 일년이건

절간 수행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나라.


불교 국가가 대체로 그렇듯

사회 전반의 질서도

완벽했다.








라오스에 우리 차가 이렇게

많다니.


어림잡아 헤아려 보니

토요다 등 일본차가 40%,

현대 기아차가 30%.


시장점유율 2위다.


기업의 힘이 곧

국력이다.


내가 여행을 다니는 원천도

결국 우리 기업들이 수출해서

번 돈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기업가들이야 말로 

이 시대의 원초적인

애국자였다. 








장장 왕복 여섯 시간

동남아의 젖줄 메콩강을 따라

찾아간 빡우 동굴의 불상들.

 

선상 식사를 겸한

크루즈 유람.

 

롱 테일 보트로 오르내린

방비엥 쏭강 계곡의

일몰.


꽝시 폭포.

블루 라군 1,2,3.







여행 가이드 북 따라

기껏 깎아봤자 우릿돈 1,2천원에  

툭툭이 타고 성태우 타면서

덩컹거리며 하는 시내 관광.

해볼 만 했다.








낮엔 더웠다.


대통령궁에서 빠투싸이까지 왕복

비엔티안의 텅빈 새벽길을

혼자 걷기도 했다.


서울로 치면 효자동에 숙소를

정했기 때문에 들며나며 쉬어가면서

비엔티안의 주요 사찰과 문화재를

두루 관람할 수 있었다.


때로는 도심에서 멀리

곳에 따라 가까이 숙소를 잡는 건

자유여행에 팁.









자연의 산천 경개는 의구해서

현대 문명에 찌든 사람들이

찾아드는 나라.


몇 날 며칠을 아득히 먼 산을

멍하게 바라보며

힐링하는 곳.


누구나 만나면 두 손 모아

인삿말 '씨바이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라오스를 기억하게

하는 말.


다시 오고 싶은

나라.


라오스였다.








뿌시 힐, 꽝시 윗 폭포 가는 길,

빠뚜싸이 계단을

나는 올라가지 못했다.


못했다기 보다 안했다.


악착스레야 못오르랴만

날씨가 더운데다 남의 나라,

무리하지 않기로 애시당초

작정한데 따랐다.


그런데 집사람은 혼자서

다 올라갔다 왔다.


못말리는 호기심이다.








'자유 여행에 무슨 공부!' 하며

큰소리치며 나선 건 

집사람이 워낙 예습을 많이

한 걸 알기에 그저 해본

내숭이었다.


왕복 항공편, 숙소 예약,

현지 교통편 송금 등

인터넷으로 처리했다.








작년 장기간의 입원 끝에

작정한 첫 여행.

 

과연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 가.


내심 걱정하며 나선

라오스 여행이었다.


나로선

도전이었다.


해냈다.


태국 국경이 보이는 

비엥티안 야시장의 노천 식당에서

덥썩 삼킨 매운 꼬지에

혼비백산하기도

했지만. 








가는 곳 마다 시선을 막는

라오스 맥주의 자존심 비어 라오,

메콩강 산자락 위스키 마을의

시음주 한 잔조차 

외면할 수 밖에 없었던 건, 

돌이켜보건대 이번 여행

최대의 아쉬움이었다. 








70년대 엔고 시절 일본사람

깃발관광을 연상했다.


어딜 가나

왁자지끌 요란하면 우리나라

사람들.


더러 사진을 찍어주기를

자청했고 부모 대하듯

말을 걸어왔다.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도

눈웃음으로 정답기는

마찬가지.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 여행에

부부 동반은 이따금 보았어도

70대 부부의 자유여행은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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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중독성이 있다.

특히 자유 여행.


재작년에 한 해

일곱 번 나들이 한 적이

이를 반증한다.


여행은 호기심과

설레임이다.


계로록에도

여행이란 많이 할수록

좋단다.


어차피 인생이

여행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