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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일기

귀촌일기- 완화군의 상여가 태안까지 온 사연은?







시골길을 가다보면 가끔 별다른 이야깃꺼리가 있다.

무심코 지나가면 모른다.


오늘도, 저멀리 논 가운데 

제각 비슷한 건물이 덩그러니 엉뚱한데다 

길가 전봇대에 표시 하나.


"태안 승언리 상여'


승언리 하면 청해진 장보고와 승언 장군,

꽃지해변의 할미,할배 바위 전설이 얽힌 곳이 

아니던가.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에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315호로 지정된 상여(喪輿)가 있다.


   고종황제 아들 완화군의 장례 때 사용한 상여이다.


   어째서, 왜, 한양에서 충청도 태안까지 

어떻게 오게 된 것일까?









완화군(完和君) 이선(李墡)(1868-1880)은 흔히 완친왕 또는 완왕으로 부른다.

명성황후가 낳은 순종보다 여섯살 많은 고종의 서장자이다.


완화군은 영보당 귀인 이씨 소생이다. 

영보당 이씨는 1863년 고종이 즉위한 직후에 입궁하여 궁여 중 처음 왕자를 생산한 궁인으로, 시원스럽고 매사에 적극적인 성품을 닮아 완화군 또한 준수하고 총명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첫 손자인 완화군을 총애하여 세자의 자리를 염두에 두기도 했다. 

  

1866년 가례를 올린 명성황후 민비가 뒤늦게 입궐하면서 경쟁관계가 되었다.

 

완화군이 13세로 요절하였다.

완화군의 갑작스런 죽음에는 명성황후의 모략이 개입되어 있다는 설이 있다.

 

대한제국 말기에 빚어진 궁중 드라마 한편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태안군 승언리 출신 김병년(金炳䄵 1855-1927)승지 벼슬을 할 때 시강원 스승으로 완화군을 가르쳤다. 

완화군이 죽자 승언리 주민을 동원하여 상여를 메게 하고 자신이 죽으면 이 상여로 장사를 지내게 해달라고 청해 하사 받았다.

상여는 1927년 김병년의 장례에 사용된 이후 승언리에서 보관하게 되었다.

상여는 길이 2.2미터, 폭 1미터, 높이 1.5미터 크기에 조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김병년문과에 급제하여 승지에 이르렀으나 조선 말 어지러운 정세를 개탄하여 낙향하였다. 1906년 사재를 털어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에 현재 안면초등학교 전신인 광영신숙(廣英新塾)을 세워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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