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데리가 다 됐나봐요. '사랑의 밧데리'가 아니고 디카 배터리. 서울 역사박물관을 나온 뒤 더 이상 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래서 수십 년 만에 다시 찾은 오늘의 명동을 배경으로 하는 인증 사진이 없다. 하긴 사진이 대수인가.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오라는 신호로 알아들으면 그만인 걸. 그래도 너무 밍숭맹숭하므로 그 시절의 추억을 더듬는 의미에서 조금 전 전시관에서 찍은 60년대 명동거리 풍경 흑백 사진 두 장으로 오늘의 기분을 대신한다.
내가 처음 본 명동은 60년대 중반이다. 같은 시절을 보낸 누구인들 명동이 없으리오. 덕지덕지, 그런저런, 추억이 마른 잎새가 되어 책갈피에 끼이고 명동 바닥에 겹겹이 도배가 되어있을 것이다.
이번에 서울 가면 맘 먹어 가보기로 점찍은 데가 일찌감치 한군데 있었다. 이번엔 꼭.
경희궁 옆 서울 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명동이야기'.
-그 사람 그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가슴에 있네.... 박인환이 노래했다.
-인환이, 네가 없는 명동, 네가 없는 서울, 서울의 밤거리, 네가 없는 술집,찻집,영화관, 참으로 너는 정들다만 애인처럼 소리없이 가는구나.... 30세 나이에 떠나가는 친구 박인환에게 조병화는 이렇게 조사를 했다.
명동이 어디인가. 8.15, 6.25를 거치며 고스란히 떠안은 상흔. 분단과 이산의 아픔이 가시지 않은 50년대. 찌질이도 찌들어 앞뒤 되돌아볼 엄두조차 나지않았던 그 시절. 거처할 곳 없고 정 붙일 곳 없던 우리 문화 언저리의 군상들. 전혀 불모지와 다름 없었던 동토의 시절. 명동에서 문학,음악,연극,영화라는 예술의 혼이 태동하여 민초의 오아시스가 되어 목마름을 달래고 때론 온돌방을 지피는 불쏘시개가 되어 따사롭게 아픈 상채기를 그나마 어루만져주었다. 가난했으나 낭만을 거론했고 꿈과 열정이 있었다. 예술혼의 요람이자 청춘이 쉬어가는 보금자리였음이라.
흐른 세월 흔적 오늘에 있네. 나는 어딘가 놓여있는 방명록에 잉크가 말라 잘 나오지도 않는 프러스펜 뚜껑을 열어 꾹꾹 눌러가며 말이 되는지 생각나는대로 몇자 적었다.
경희궁을 나와서 집사람과 좀 더 걷기로 했다. 내친 김에 명동까지다. 구세군, 새문안교회는 그대로이고 크라운 빵집은 없다. 광화문 연가가 울릴 법한 덕수궁 돌담길을 비껴지나 곧장 태평로 비각의 광화문. 발길을 멈추어 이순신 장군과 먼발치의 세종대왕을 감싼 북악을 잠시 바라보다 사통오달 탁트인 광화문 네거리를 가로질러 동아일보사를 돌아 청계천, 연이어 시청.
얼마만인가. 명동. 옛 내무부 자리를 왼쪽으로 끼고 오르는 을지로의 명동. 혹시나 해서 두리번거렸으나 OB's cabin, 훈목 다방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인파를 따라 명동 입구 큰 거리로 올라가니 유네스코, 그 바로 옆 명동파출소는 이제나저제나 그 모습 그대로 굳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옛 국립극장도 온갖 풍상 우여곡절 끝에 일단 허우대가 멀쩡함에 안도하며 다행으로 여겼다.
명동에 가면 내가 잘 가는 순두부집이 있었다. 학생 신분에 헐렁한 호주머니 사정을 그나마 위로해주었기에 밥 때가 되면 절로 발길이 먼저 갔던 곳이 '명동 순두부집'이었다. 굴,버섯,돼지고기 중 그날 기분에 따라 선택을 했던 그 때의 전문 순두부집은 자취없고 한갓 실비집 메뉴판의 메뉴 하나로 버티며 궁색하게 남아있다. 그래도 옛맛을 더듬어 어근버근 그 언저리 쯤 어느메 골목을 돌고 돌아 어느 집에 들어가 집사람과 마주앉아 순두부를 시키고 대낮에 청하 한 병을 덧대어 주문하고 보니 그 시절에 비하면 사치인가 호사인가.
지금 명동은 일본 사람과 중국 사람들이 점령했다. 웃어야 할 지 어째야 할 지 모르겠으나 일본말 중국말로 인사를 걸고보는 글로벌 상술이 온통 명동거리를 땜질하고 있다. -세월이 가도 옛날은 남는 것.
'현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촌일기- 들쥐의 소행 (0) | 2012.03.04 |
---|---|
춘삼월, 봄을 만나다 (0) | 2012.03.02 |
요 녀석, 이 좀 보자 (0) | 2012.02.27 |
여유 (0) | 2012.02.25 |
귀촌일기- 앵두주와 매화 (0) | 2012.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