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1980년 전후 10여 년을 서대문구 연희1동 산비탈 아래서 살은 적이 있다. 지대가 높아 멀리 한강 너머로 김포뜰과 행주산성, 성산동 상암동 벌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루가 멀다하고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은 뜬금없는 불로 검은 연기가 몰려왔고, 몇 번인가 김포공항 가는 길 사천교 고가도로 공사장은 붕괴사고가 빈번해 현장이 발 아래 내려다 보였다. 쓰레기 매립장이 하늘공원이 되고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이 우뚝 선 건 내가 연희동을 떠난 그 한참 뒤다... ...
우리집 뒷산은 멀리서 보아 야트막하나 가까이 보면 산세가 가팔랐다. 성산대교에서 서울 도심으로 들어오는 고가도로에서 정면으로 이마에 띠를 두른듯 대형 야립 광고 간판이 줄줄이 서있던 이 산이 '104고지'라고 불리는 연희산이다. 기습 남침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최후의 방어선을 쳤던 전세를 9.15 인천상륙작전으로 단숨에 반전시킨 여세를 몰아 서울을 향해 진격하면서 인민군 잔당의 퇴로를 차단하며 서울 탈환의 교두보를 마련했던 격전지였다... ...
오늘 국군의 날. 10월 1일. 문득 연희동 시절이 생각났다. 인터넷에 들어가 지도를 찾아 살펴보니 주변이 확 달라졌다. 온통 아파트다. 104고지 연희산 일대는 처음 들어보는 '궁동 공원'이 조성되었다. 이제 40대가 된 집 아이들이 여나므 살 먹었을 때 아침 산보를 하면서 가위 바위 보로 아카시아 이파리 따내기 시합을 했던 곳. 여름철 비가 크게 내린 날이면 계곡을 따라 거센 흙탕물이 쏟아져 내려 밤새워 가슴을 졸였던 기억... ...
104고지를 둘러싼 원근에는 다양한 부류의 주민들이 다닥다닥 어울려 살았다. 홍수가 지면 범람하는 상습 침수지역 홍제천 지류 모래내 개천을 따라가다 긴 산비탈을 오르면 여느 달동네나 다름없는 판자촌 서민들, 그 너머로 연희 교차로 인근에는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사저가 있었다.
우리집 몇 집 걸러 이웃에는 나중에 바둑 황제가 된 조훈현 기사, 여성 정치인 박영선의 집이 있었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한 박영선이 어느 방송국에 취직을 했다며 매달 한번 씩 집집이 돌아가며 열렸던 반상회에서 주민들이 축하를 해주었던 기억도 있다... ...
6.25 전쟁사에 혁혁한 전공을 기록한 역사의 현장 연희산,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던 9.28 수도 서울 수복의 감격, 바로 며칠 후 10월 1일, 38선을 돌파했던 위업도 104고지의 승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04고지 꼭대기에는 불굴의 해병대 정신을 기리는 자그마한 전적 표지판이 있었다. 연희산을 둘러싸고 있던 대형 야립 간판은 대공포 군사시설을 은폐하기위한 시설이었다. 지금도 104고지에 수도 서울의 방공망을 지키는 국군 장병들이 주둔하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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