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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의 팡세

귀촌일기- 1.20 동지회 <청춘만장>과 <반일 종족주의>(2)








<靑春挽章>에서 전혀 뜻밖에 나는 나의 대학시절에 은사 두 분을 만났다. 董 玩 교수와 朴熙永 교수다. 두 분이 학병 출신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1973년 갓 발간된 <靑春挽章>을 1.20 동지회 정기영 총무님으로부터 받았을 당시 무심코 책장에 꽂아두기만 했는데 그 무심이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동 완교수님은 러시아어과 과장으로서 내가 1967년 한국외국어대학 1학년 재학 당시 학교 신문사 <외대학보>의 초년병 학생 기자로 입사했을 때 지도교수를 보직 겸임하고 계셨다. 마침 앨범을 펼쳐보았더니 흑백 사진 몇 장이 스무살 남짓 그 때 학창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술잔을 따르고 있는 동 교수님 앞에 단발 여자 어린이는 동 교수님의 따님이다. 창경궁에 학교 신문사 기자들이 봄나들이 갔을 때였다.  당시 열 살 안팎으로 지금 쯤 60이 넘어 손자 볼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사진은 1967년 가을, 교수 식당에서 신문사 선배들과 더불어 마침 동 교수님과 나란히 앉았던 신입기자 환영회 장면이다.







박희영 교수는 영문학자로 교양과목으로 영문학 개론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 목이 불편해서 강의하시는 내내 짬짬이 물을 마시던 기억이 생각난다. 나는 당시 20 세, 교수님들은 45 세였다.







동 완 교수는 1922년 함북 명천 태생으로 만주 건국대학 정치과를 중퇴, 만주 안동의 관동군에 입대, 1945년~1949년 시베리아에서 포로생활을 했다. <靑春挽章>에서 <시베리아 포로기>를 썼다.

박희영 교수는 1922년 경남 밀양 태생으로 동경 외국어대학 영문과를 중퇴, 1944년 1월 20일 일본 중부 8부대에 학병으로 입대했다. <靑春挽章>에서 <내가 겪은 戰爭과 平和>를 기술했다.





두 분 교수 외 <靑春挽章>에서 또 한 분을 만났다. 작가 李炳注 선생이다. 대학 시절의 학과 클라스 메이트였던 이권기 군의 부친으로 이병주 선생에 관해서는 내 블로그에서 여러번 기술했으므로 오늘은 이야기를 줄인다. (블로그 2011. 8.10 자  '세월 아마도 빗물이겠지',   2016. 1.15 자 '이병주 문학관에서 그 친구를 만나다' 등). 

다만, 1.20 동지회에서 '문화부장'으로 <靑春挽章>을 발간하는데 주역이었다는 사실. 신문사 편집국장을 엮임했으며 대문호 반열의 이병주 작가도 1.20 동지회라는 친목단체에서는 일개 부장이었다는 점이 재미있다.

<戰地에서 만난 中國少年>을 읽어보니 물에 빠져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자신을 구해준 중국 소년에 대한 감동어린 감사 이야기다. 





1944년 1월 20일 4.385명, 소위 '조선인학도 육군특별지원병'이 일제히 입대하여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하여 돌아왔으므로 그다지 길었다고 볼 수 없는 일 년여 기간이었다. 전장에서 죽은 자는 말이 없다. <靑春挽章> 말미에 붙어있는 1.300 여 명의 회원 명단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살아 돌아와 27년이 지난 1973년 현재 확인된 분들이다.






<靑春挽章>에 수록된 1.20 동지회 회원 60여 명의 수기는 862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죽음의 사선을 넘나드는 전선에서 처절한 긴박감을 에피소드 중심의 경험담으로 풀어냈다. 生과 死,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병영 생활에서 지나고 보니 향후 인생의 바탕이 될 자양분을 축적하게 되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