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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일기

귀촌일기- '손녀의 어릴 적 추억에 담길 총천연색 자연'

 

 

최근 어느 회사의 사보에 실린 나의 글이다.

 

 

창을 두드리는 천둥 번개에 새벽잠을 깼다. 지금 바깥에 내리는 비바람이 얼마나 매서운 줄 누워서도 안다. 우비를 갖추는 둥 마는 둥 나가보니 날아갈 건 모두 날아가고 그나마 제자리에 버티고 있는 건 들이친 비에 흠뻑 젖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하루 종일 이런 비는 처음 본다. 집 뒤로 오가던 경운기 엔진 소리는 사라지고 인적 없이 온 동네는 빗소리에 파묻혔다. 긴긴날 가뭄타령은 사흘 만에 쏙 들어갔다.

 

솔밭너머 콩밭에서 산비둘기를 쫒는 대포의 포성이 빗줄기를 뚫고 간간이 들려온다. 이른 새벽부터 훠이훠이하는 높은 목청도 옆집 아주머니의 산새 쫒는 소리다. 산비둘기들은 갓 돋아나는 콩의 노란 싹을 싹둑싹둑 간단없이 먹어치운다.

밭 가운데 꽂아둔 빨간 우산대의 공갈도 삐딱하게 선 허수아비의 눈초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대포 소리인들 지나가는 사람만 놀라게 할 뿐 약아빠진 날짐승들에게 통할 가.

 

 

유월 중순 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백년만의 가뭄이니 어쩌니 하며 두 달 동안의 고역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농심은 타들어갈대로 타들어 오다가다 서로 만나면 첫 인사가 하늘 쳐다보는 일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땅에서 마늘과 양파를 캐고 가뭄에 제대로 자라지 못한 단호박을 어쩔 수 없이 거둬들여야 했다. 그 자리에 메주콩을 파종하거나 로타리를 쳐 고구마 순을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포강에서 물을 퍼올리는 펌프 소리로 온 동네가 요란했다. 물을 대느라 밭고랑을 따라 줄줄이 깔린 호스가 어지러웠다.

뻐꾸기가 숨 가쁘게 울어댄 끝에 어쩌다 비구름 떼가 지나갔으나 빗방울을 셀만큼 뿌리고 감질만 냈다. 앞뜰 간사지엔 물이 넉넉한 수로가 있는데다 일찌감치 모내기를 마쳤기에 한밤중에 들려오는 개구리의 합창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우리 밭에는 매실나무가 많다. 작년에 백여 키로를 수확해 올핸 그 두 배인 2백 키로의 목표를 일찌감치 세우고 있었다. 수확 직전이 매실의 비대기인지라 때를 놓치지 않고 관수를 잘 해야 한다.

아침저녁으로 7십 여 그루 매실나무 물주기에 바빴다. 게다가 부추, 상치, 열무, 배추, 시금치, 고추, 가지, 파프리카, 오이, 토란, 옥수수, 완두, 토마토, 야콘 그리고 쌈 채소 등등. 자투리땅 한 뼘도 놀리지 않았으므로 그야말로 물 주는데 하루해가 저물고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노란 꽃을 피운 토마토가 열자마자 중간이 시커멓게 썩었다. 해마다 토마토를 심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읍내 나간 김에 토마토 모종을 판 아줌마에게 토마토 샘플 하나를 들고 가서 물어보았다. 물어보러갔다지만 실은 병든 모종 탓이 아닌 가 따지러 간 것이다.

 

모종 아줌마 왈.

"배꼽병이유. 가물어서 그래유. 비가 와야 허는디..."

 

나는 그 한마디에 맥이 풀렸다. 가뭄 탓이었다. 토마토 배꼽병 퇴치를 위해서라도 비가 와야 했다. 아침저녁 물 백번을 줘도 한번 내리는 비만 못하다는 게 자연의 위대함이다.

 

 

장맛비 뒤에 나를 긴장시키는 건 다름 아닌 잡초다. 가뭄으로 땅바닥에 엎드려 눈치만 보던 잡초들이 이번 비로 제 세상을 만났다. 곧 주인 행세를 할 태세다. 나는 풀 약인 제초제를 쓰지 않기에 예취기로 깎거나 시나브로 일일이 손으로 들어낸다.

이것도 땅이 말랑말랑하고 잡초의 크기가 고만고만할 때를 놓치면 구제불능이다. 며칠 전에 카눈 태풍이 비교적 얌전하게 지나갔다. 이맘 때 잡초는 하루 밤낮이 무섭다. 뿌리가 더 깊어지기 전에 일단 기선 제압을 해야 한다.

오늘도 예취기를 들었다. 햇살이 퍼지기 전인데 습기 찬 지열이 올라와 숨이 막힌다. 온몸은 흠뻑 땀에 젖는다. 2,3일 내 고구마, 대파, 고추밭 고랑을 단속하지 않으면 가을까지 속수무책으로 잡초 쑥대밭을 각오해야 한다.

 

 

며칠 전 초등학교 2학년과 다섯 살짜리 외손녀가 다녀갔다. 학교에 입학하더니 농촌에 대한 관심 사항이 점점 늘어나 아빠 엄마를 졸라서 올 들어 네 번째다. 이 녀석들이 내려온다면 체험학습 프로그램의 기획은 물론 도착하자마자 실습에 돌입해야 하니 애들 손님 대접이 더 번거롭다.

 

5만 원짜리 지폐에 신사임당이 그린 가지가 보인다. 오죽헌에서 나서 자란 이율곡에게 미친 텃밭 교육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아이들에게 우리의 농촌을 보여주고 자연과 더불어 놀게 해야 한다.

봄에 왔을 때 정성드레 씨를 뿌린 옥수수를 이번에 땄다. 푸짐한 옥수수 파티가 이 녀석들의 환영회가 되었다. 지난번에는 마침 오디 철이라 따먹다 놀다 입과 손이 온통 보라색 오디 물로 범벅이 되어 즐거워했었다.

 

돌잡이 때 수돗간 옆에 기념식수로 심은 앵두나무와 주렁주렁 달린 빨간 앵두는 이미 이 녀석들만의 얘깃거리로 자리를 잡았다.

이마에는 어쩌다 모기에 물린 자국을 지닌 채 돌아갔다. 반백년 전 나의 어릴 적 추억이 그대로 살아있듯이 외갓집 방문은 이 녀석들에게 실로 총천연색 추억 덩어리로 고이 간직될 것임에 틀림없다.

 

새벽이다. 동창이 밝아오는 걸 보니 장마가 물러간 게 확실하다. 파란 하늘가에 조각달이 남아있고 전깃줄엔 제비가 줄줄이 앉아 재잘거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