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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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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의 다솔사(2) 님은 갔습니다 47년 만의 다솔사. 대양루를 비켜 돌아드니 박우물을 만났다. 한 박 가득 떠서 마셨다. 1969年 1月24日(12.7) 金 乍曇乍晴 점심 후 수좌 상현군의 안내로 조실 최범술 스님을 배알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스님은 서책을 읽고 계신 듯, 방안의 사방에 놓여진 장서용 캐비넷과 옆에 육중하게 걸..
혜명스님의 통화,효당이 주신 금강삼매경론 의미 알다 뜻밖에 스님 한분의 전화를 받았다. 대전 혜명정사의 장혜명이라고 소개를 했다. 어제 내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읽고 물어물어 전화를 하신 것이다. 김상현 교수를 어릴적부터 잘 알며 다솔사에서 효당의 가르침을 받았노라고 말했다. 雖無切能應機說話猶如天鼓 삼십여년 전 효당 최범술 ..
김상현 교수를 애도함,45년 전 다솔사 시절을 회상하다 오늘 아침에 텔리비전 화면 밑으로 지나가는 자막을 보고 놀랐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별세' 2011년 8월12일 이 블로그에 올렸던 내 글이 생각났다. '다솔사일기'라는 소제목으로 7회에 걸쳐 다솔사 이야기를 썼는데 마지막 분을 다시 전재하면서 김상현교수의 별세를 애도합니다. -..
다솔사 일기(7) 원효와 효당 오늘 새삼 꺼내본다. 그 때 주신 글을 007가방에 접어둔채 지금까지 그대로 있어 송구스럽다. '茶道無門'은 그렇다치고 원효대사의 금강삼매론 중의 글 -雖無切能應機說話猶如天鼓- 의 의미를 아직 나는 모른다. 당시 효당의 말씀을 듣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기억에 남아있지 ..
다솔사 일기(6) 汝矣無門 1969年 1月30日(12.13) 木 曇後雪 열흘의 산사 생활을 끝내고 하산했다. 눈덮힌 다솔사 송림 사이로 이불보퉁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내려왔다. '작품이 없다고 예술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김시습이, 서양에서는 조각가 자코메티가 보여주었다. 예술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완성을 위해 다가가는 것이다. 1970年 1月31日(12.24) 土 晴 하산했다. 스무날도 못됐는데 내려가느냐고 혜담 스님이 말했다. 참는 것도 수양이라 인내가 없으면 성사를 할 수 없고 타성이 되면 대사를 이룰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상현군을 만나러 갔으나 없어 섭섭했다. 백암과 윤달군이 절 아래 추동까지 바래다 주었다. 다솔사에 오는 것도 이젠 어려울 것 같다. 69년,70년 각각 열흘, 스무날 ..
다솔사 일기(5) 五味 효당을 처음 만난 날이다. 죽로지실. --------------------------- 1969年 1月24日(12.7) 金 乍曇乍晴 점심 후 수좌 상현군의 안내로 조실 최범술 스님을 배알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스님은 서책을 읽고 계신 듯, 방안의 사방에 놓여진 장서용 캐비넷과 옆에 육중하게 걸려있는 박달나무 목탁이 먼저 눈에 띄었..
다솔사 일기(4) 음양 봉일암(鳳逸庵) 마루 끄트머리에 종이 매달려 있었다. 예불시간 때면 스님이, 때론 처사가 옆에 놓인 나무 방망이로 종을 치는데 툭툭 마루를 두어번 울린 다음 댕댕댕 조용하게 치기 시작하다 소리를 죽이고 또 다시 조금 더 크게 치다가 이렇게 서너번 되풀이 한 다음 드디어 힘차게 종을 쳤다. 산사 ..
다솔사 일기(3) 청동화로 1970年 1月23日 (12.16) 金 晴 점심 후 절에 내려가 최범술 조실스님과 두 시간 가까이 마주앉아 얘기할 수 있었다. 스님이 말씀하신 요지는 이렇다. -민주주의--- 하지만 천 몇 백년 전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민주주의 사상이 있었다. 즉. 원효대사가 말한 '인민이 하고싶은대로 하게 모든 곤욕 으로부터 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