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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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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평에서 45평...국회의원 회관 변천사 1971년, 나의 첫 직장은 세운상가에 있는 국회의원 회관이었다. 그 해 4.27 7대 대통령 선거와 5.25 8대 국회의원 선거가 연달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경남 진주 진양을 선거구로 하는 국회의원 후보자의 선거운동에 참여했는데 당선 직후 서울로 올라와 비서로 근무하게 되었다. 국회 사무처 소속 공무원이 된 것이다. 사무실은 국회의원 204명에게 배정된 8평 짜리 였다. 통칭 '세운상가' 라지만, 을지로와 퇴계로 대한극장 사이는 풍전상가, 신성상가, 진양상가 건물로 이름 지었다. 5개 층을 빌어 1968년 7월, 국회의원 회관으로 개관했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20년만에 마련된 우리나라 첫 국회의원 합동 사무실이었다. 청계천 고가도로 건설, 여의도 윤중제 공사와 더불어 세운상가는 당시 ..
윤희숙 21대 국회의원 1977년 즈음이었다. 김영기 제헌의원을 여의도 국회의사당 국회부의장실에서 몇번 만나뵌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국회부의장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제헌동지회 총무를 맡고 계셨던 김영기 의원께서 제헌동지회 어떤 현안을 협의하기 위해 가끔 오셨다. 어느날, 마침 그날은 최범술 제헌의원과 함께 오셔서 하신 말씀이 기억에 생생하다. '국회의원의 질이 갈수록 떨어진다'는 요지였다. 당시 9대 국회 시절이다. 1948년 초대 국회인 제헌의회 이후 3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국회의원의 질이란 무엇인가? 현재 21대 국회다. 그때부터 또 4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국회의원의 질은 어떤가? 소신과 결단력에서 김영기 제헌의원의 말씀을 생각하며 나는 오늘 윤희숙 의원을 보았다. 10년 전 2011년 8월, 물어물어 찾아..
2016년의 다솔사(1) 봉일암 주춧돌은 그대로인데... 이번 남도 여행에서 꼭 들르고 싶었던 곳. 다솔사. 봉일암. 그 샘터. ( 1969년 봉일암 앞에서 주지 慧潭, 처사 一心, 보살 玉蓮花, 月峰, 白岩, 順心 .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 다솔사(多率寺)의 절간생활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대학시절 겨울방학 때 이불과 옷가지를 싸들고 69년, 70년 이태..
혜명스님의 통화,효당이 주신 금강삼매경론 의미 알다 뜻밖에 스님 한분의 전화를 받았다. 대전 혜명정사의 장혜명이라고 소개를 했다. 어제 내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읽고 물어물어 전화를 하신 것이다. 김상현 교수를 어릴적부터 잘 알며 다솔사에서 효당의 가르침을 받았노라고 말했다. 雖無切能應機說話猶如天鼓 삼십여년 전 효당 최범술 ..
김상현 교수를 애도함,45년 전 다솔사 시절을 회상하다 오늘 아침에 텔리비전 화면 밑으로 지나가는 자막을 보고 놀랐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별세' 2011년 8월12일 이 블로그에 올렸던 내 글이 생각났다. '다솔사일기'라는 소제목으로 7회에 걸쳐 다솔사 이야기를 썼는데 마지막 분을 다시 전재하면서 김상현교수의 별세를 애도합니다. -..
다솔사 일기(7) 원효와 효당 오늘 새삼 꺼내본다. 그 때 주신 글을 007가방에 접어둔채 지금까지 그대로 있어 송구스럽다. '茶道無門'은 그렇다치고 원효대사의 금강삼매론 중의 글 -雖無切能應機說話猶如天鼓- 의 의미를 아직 나는 모른다. 당시 효당의 말씀을 듣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기억에 남아있지 ..
다솔사 일기(4) 음양 봉일암(鳳逸庵) 마루 끄트머리에 종이 매달려 있었다. 예불시간 때면 스님이, 때론 처사가 옆에 놓인 나무 방망이로 종을 치는데 툭툭 마루를 두어번 울린 다음 댕댕댕 조용하게 치기 시작하다 소리를 죽이고 또 다시 조금 더 크게 치다가 이렇게 서너번 되풀이 한 다음 드디어 힘차게 종을 쳤다. 산사 ..
다솔사 일기(3) 청동화로 1970年 1月23日 (12.16) 金 晴 점심 후 절에 내려가 최범술 조실스님과 두 시간 가까이 마주앉아 얘기할 수 있었다. 스님이 말씀하신 요지는 이렇다. -민주주의--- 하지만 천 몇 백년 전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민주주의 사상이 있었다. 즉. 원효대사가 말한 '인민이 하고싶은대로 하게 모든 곤욕 으로부터 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