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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귀촌일기- '미국서 온 사진 두 장'의 추억(2) 답장 사진 여섯 장









'기록은 기록일 뿐.'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수많은 사초들이 실록에 오르고

역사로 남는 건 드물다.


나는 기록했다.


1982년 2월. '점령군'으로 온

최선래 사장과, 영태 부사장.

 

그 전후의 기억들이 

생생하다.


며칠 전, 우연찮게 배병열 후배가

미국서 보내 온 여섯 장의 사진은  

3십여 년 잠자고 있던 나의 앨범을

들춰보게 만들었고, 나의 비망록을

열어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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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 6월 1일.

그룹 기조실 진단 팀이 회사에 들이닥쳤다. 팀장은 이헌출 부장이었다. 진단 팀은 기조실의 김영태 전무의 지휘아래 있었다. 기조실은 기획조정실로 럭키금성 그룹 회장실의 직속이다.

한 달 가까이 본사, 청주공장, 오산공장을 돌며 회사의 실상을 낱낱이 팠다. 말이 진단이지 감사였다.

이런 사태는 이미 예고되었다. 그러나 감사의 끝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10.26과 12.12 사태를 거치며 80년 들어선 전두환 정부의 중전기 통폐합 조치로 초고압 검사설비의 6십 억 원의 기존 투자는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다.

오산공장의 초고압동에는 이상하게 생긴 시험기기가 먼지를 둘러쓰고 있었다. 나는 '미사일 발사대'라고 했다. 외계의 우주 정거장처럼 보이는 이 물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했다. 몇 년 후 이 흉물이 비로소 제구실을 할 날이 돌아왔을 때 임직원 모두는 감격했다. 그러나 그 때까진 을씨년스러웠다.


 

79년 초에 청주 4공단에 청주공장을 기공했다. 3만평에 60억 원의 투자가 진행이 되고 있었다. 최문영 건설과장이 신입 사원들을 안내했다. 건설 책임자는 정해진 본부장이었다.

환율은 나날이 뛰고 금리가 25%인 시절이었다. 자금의 조달 코스트까지 감안 한다면 이자만 30%가 넘었다. 금리가 오를수록 회사에서 자금부서는 바깥에서 살았고 안으로 그 위세는 대단했다. 제2 오일 쇼크에다 급기야 10.26사태 여파로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81년도 당기순이익이 12억 적자였다. 74년 회사 창립 이후 첫 적자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해마다 매출이 60%, 80% 신장하던 회사가 끝 모르게 곤두박질쳤다. 81년 매출 313억 내용을 짚어보면 물량증가는 없이 한전 등 관납에 의한 가격인상으로 달성했다고 그룹의 기획조정실은 분석했다.

 

윤욱현 사장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비상경영 체제를 알리는 청사진 카피 회람을 전 부서에 돌렸다. 사장의 새끼손가락에 낀 특유의 초록색 만년필 사인이 힘이 없었다. 윤 사장은 비상을 선포하면서까지 하면서 사내 분위기를 위축시킬 분이 아니었다.

74년 창립되어 넘쳐났던 신설 회사의 패기는 꺾였다.  그룹내 기획통으로 금성통신에서 분리해서 회사(금성계전)를 만든 윤 사장의 카리스마에 상처를 남겼다.  초대 사장에서 물러나 잠시 자매사로 갔다 다시 3대 사장으로 돌아온 윤 사장으로서 오산공장의 초고압 투자와 청주공장의 건설은 회사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단안이었지만 닥쳐온 내외의 시련은 혹독했다.

 

임원은 보너스를 동결했다. 90일 인센티브에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사무기술직 사원 45명을 내보내고 청주 오산 양 공장의 현장 기능직을 3백여 명을 정리하기로 했다.

인사 노무를 담당하고 있는 총무부장인 나는 매일 아침, 어제까지 얼마나 퇴직을 했는지 공장으로부터 상황을 파악해서 윤 사장에게 보고했다. 남자 사원들은 눈치를 보며 꿈쩍도 않고, 어차피 결혼을 하면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여사원들 만 인센티브 조건을 따져본 후 앞 다투어 먼저 나갔다. 자연히 공장 생산라인의 인력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공장의 현장 기능직 일부가 올라와 사장 면담을 요구했다. 관리자 중에는 내가 왜 나가야되느냐고 술 취해 따졌다.

복리후생비 성격이 짙은 접대비 예산을 30% 일률적으로 삭감하자 영업 부서에서는 아우성이었다. 바깥으로 나가야 할 영업사원들은 회사 안에서 책상머리를 겉돌았다.

자금부서에서는 가지급금을 정리하라는 독촉이 하루걸이로 빗발쳤다. 영업부서는 팔기보다 ‘수금’에 열을 올렸다. 공장은 만들기보다 ‘재고’에 골머리를 알았다.

제록스 복사 한 장도 상위자의 결재를 받아 청구해야 했다. 더욱이 청카피를 이용하도록 유도했다. 텔렉스 문안의 글자 하나도 최대한 줄였다. 별도로 강사를 불러 텔렉스 문장 만들기 교육을 받았다.


 

비상은 비상을 불러 갈수록 냉엄했다. 악순환의 고리는 시끄럽고 끝이 없었다.

81년 12월30일 종무식은 기가 찼다. 책상을 길게 이어붙이고 모조지를 깔았다. 마른안주와 귤이 올랐으나 그대로였다. 됫병 차가운 정종이 올랐다. 종이컵에 정종 몇 잔을 털어 넣고선 축 늘어진 어깨를 추스르며 말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충무로 극동빌딩 17층의 섣달그믐의 종무식은 스산했다.



1982년 봄. 꽃샘추위까지 몰아쳐 어수선했다. 2월 주주총회에서 가는 사람 오는 사람이 드러났다. 윤욱현 사장이 물러났다. 도토리 키 재기 같은 임원들 사이에서 홀로 우뚝했던 윤봉순 상무도 퇴진했다.

최선래 사장과 김영태 부사장이 짝을 지어 부임했다. 최 사장은 금성사 부사장이었고 김 부사장은 기조실 전무였다. 계전으로 부임하면서 두 분 다 한 단계 승진이었다. 계전 사람들은 점령군 사령관이라고 불렀다.

 

"이익을 못내는 사장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최선래 사장은 말했다. 맑게 닦은 최 사장의 안경 사이에서 안광이 튀었다.

이 취임식 장이었다. 

먼저 퇴임 인사말을 마친 전임 윤욱현 사장이 옆에 앉아있었다. 윤 사장은 회사를 창립한 초대사장이면서 오너 사장이었던 구두회 사장 다음 다시 사장으로 온 세 번째 사장이었다. 초창기의 계전은 윤 사장 없이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았다.

전임 사장 면전에서 '사장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라며 후임 사장의 일갈은 의외였다. 임직원이 모여 있는 이 취임식 자리였다. 충격에 다들 머리를 숙였다. 그 충격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나는 총무 부장이므로 이취임식 사회를 보았다. 전임 윤 사장이 왜 그 자리에 있어야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그 자리에서는 당연히 빠져야 했다. 뺀 사람도 없었거니와 스스로 빠지지도 않았다.

최선래 사장이 직접 하나둘 순서를 나열하며 미리 준비했던 지시사항을 선포했다. 포고령이었다. 위반하면 당장 발포할 것 같았다. 윤 사장은 내내 구부정한 체구에 아무런 움직이나 표정이 없었다. 왕방울 같은 눈만 전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8시 출근. 관리자들은 그 이전에 나와야 했다. 전에 비하면 한 시간 반은 출근이 빨라졌다. 출근은 있어도 퇴근은 없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모든 투자계획 중지. 위임 전결은 없다.

모든 전표는 부사장 결재를 받았다. 심지어 화장실 휴지 구매한 전표도 다 올려야했다. 업무 파악을 위해 불가피하다지만 자존심을 건드리는 고문이었다. 당연지출은 한 달 후쯤 위임이 되었다.

 

극동빌딩을 돌아 왼쪽으로 지정 '고바우 식당'이 있었다. 배당되는 식권으로 점심은 물론 저녁도 해결했다. 백반, 순두부찌개를 입에 냄새가 나도록 먹었다. 그 메뉴가 제일 쌌다.

극동빌딩 지하층에는 빌딩에 입주해있는 금성통신, 금성반도체, 럭키콘티넨탈 카본과 4개 자매사용 식당이 있었으나 계전은 따로 빠져나왔다. 회장실에서 문제를 삼았으나 안 되는 회사 살린다는 명분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김영태 부사장은 회사 살림살이의 고삐를 계속 조였다.

허리가 불편한 신체조건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임직원들과 입씨름이었다. 문제점 중심으로 보고를 요구했다. 서두가 긴 장황한 보고도 일단 들어주었다. 성내지도 않았다. 말씨도 조용했다.

지시하는 개선 사항을 상대방이 이해하고 스스로 물러갈 때까지 기다렸다. 기조실 전무의 저력은 부사장 승진으로 내공이 한껏 쌓였다.

 

다른 이야기지만 김 부사장은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다. 부임하기 전, 총무부장인 나는 그동안 매달 기조실에서 나는 희한한 전산자료를 받았다. 토트 프린트에 차량별로 일일이 잘라서 보내왔다.

그룹소속 전 차량의 주행거리와 기름 사용량을 전산으로 계산해 랭킹을 매긴 데이터였다. 그룹 내 모든 임원과 각 사 업무용 승용차량의 연비를 알 수 있었다. 우리회사 차량중에 특별히 이상이 있는 차량은 차량 번호에 별표까지 붙여 주의를 환기시켰다.

요사이 같으면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울 시절 이야기지만 그 당시로는 괄목할 관리 기법이었다. 김 부사장의 솜씨였다.




다들 지난 날 '이카스', '락가' 시절을 그리워했다. 이카스는 스카이, 락가는 가락을 거꾸로 발음한 것이다. 아가씨가 있는 맥주홀로 사내 주당들끼리 통하는 일종의 은어였다. 회사가 있는 퇴계로 극동빌딩에서 을지로를 지나 조금 만 걸어내려가면 되는 청계천 3가에 위치했다.

영업의 이 한수 과장 이카스와 관리부문의 주상식 과장의 락가는 청계천 고가도로를 사이에 둔 쌍벽이었다. 월급날이면 박대수 락가 영업부장이 외상 전표를 들고서 사무실을 휘젓고 갔다. 박 부장이 나타났다면 그 날이 월급날이었다.



 

1982년 6월. 조직도를 새로 그렸다. 기존 조직 운영과는 다른 사업부제 조직이었다. 2월 주총에서 선임되어 새로 온 최 사장과 김 부사장에게 기존 조직과 인적 면면을 살필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인사를 담당하는 총무부장이었기에 신사동에 있는 김 부사장 자택으로 불려가 2층 서재에서 밤을 생며 조직도를 같이 구상했다. 조직도에 사람을 메워나가다 칸에 들어가지 못하면 탈락이었다.

7월1일 자, 인사이동에서 나는 심사부장이 되었다. 그날 집으로 가는 길도에 나는 신촌 홍익서점에 들러 회계, 원가분석 등 경영 참고서를 한꺼번에 일곱 권을 샀다.



 

최 사장이나 김 부사장 공장 방문 시 심사부장인 나는 꼭 수행을 해야 했다. 사장과 부사장의 말씀을 가까운 거리에 붙어서 회사 수첩에 일일이 기록했다. 내가 못가면 심사과장이 가거나 공장의 누군가가 요점을 정리해서 나한테 전달되었다.

회의도 많았다. 어려울 때 일수록 대책회의가 많다. 역시 그랬다. 매월 한번 부사장이 영업회의를 주재했고 시간이 오후 다섯 시였다. 이 회의는 담당 임원과 부장은 빠지고 대신 영업과장과 공장의 공정관리과장 그리고 본부의 관리이사와 조달부장, 심사부장이 참석 대상이었다.

각 보고에는 문제점, 대책, 건의사항을 넣도록 했다. 자칫 자기 부문의 함정을 스스로 팔가 두려워 분위기가 자못 미묘했다. 어떤 상위자는 하위자의 건의 사항에 못마땅해 하는 사례도 있었다.

공장에서는 재고 축소, 구매단가 인하와 지급기일 변동사항, 불량현황, 단납기 개선, 월말 소나기 출하 근절, 국산화 합리화 등이 주요 이슈였다. 영업은 3개월 수주 판매 이동 계획의 달성과 매출채권 회수로 수금 월령 단축, 분기 말 밀어내기 근절에 주력했다. 전사적인 총력 원가절감으로 이익 창출로 요약되었다.

 

나는 지시사항관리대장에 항목과 내용 그리고 기한을 기록하고 관련부서에 통보했다.

기한 내 수행여부를 팔로업하므로서 진도 체크를 했다. 정례 간부회의 첫머리에 이행 실적을 공개 보고를 했다.

약속은 지킨다는 정신의 주입이었다. 부서장의 최대 스트레스임에 틀림이 없었다.

전임 윤 사장 시절에 세운 당초 82년 430억 원 목표는 387억 원으로 하향 조정되었다. 전년 적자 12억을 흑자 8억으로 반전시키는 계획이었다.




어느 날 최선래 사장과 공장을 내려가는 차중이었다.

항상 뒤에 타라는 최 사장님의 권고에 따라 사장 옆자리에 앉았다. 충무로 극동빌딩 본사에서 남산 터널을 벗어나 한남동을 지나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최 사장이나 나나 별 말이 없었다.

무료하던 참에 내가 말을 꺼냈다.

"저희들이 잘 해야 하는데... 힘드시죠."

"나야 하는 게 뭐 있나. 자네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거지. 허허, 자네들이 고생 많어."

강원도 강릉 특유의 억양이 구수했다.

점령군 사령관에게 주눅 들었던 우리들에게 전혀 뜻밖의 어감이었다.





최선래 사장은 취임 인사차 언론사 순방에 내가 수행했다.

일간지 지면에 '본사내방 인사'아는 고정란이 있던 시절이었다.

국장, 부장 자리를 돌았으나 부재중이 많았다.

"일일이 다 만나야 되나. 명함 한장 던져놓고 오면 되지."



 

최 선래 사장과 청주 공장에 내려갔다. 1박2일의 출장이었다. 첫날 현장 투어를 마치고 시내 음식점에서 공장 의 관리자들과 식사를 한 다음 청주관광호텔에 투숙했다. 그날은 마침 본사에서 내려간 개발실의 이정훈 부장도 같이 있었다. 최 사장은 방으로 올라가며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조깅하자고 말했다.

최 사장은 아침 운동을 벼르고 온 듯, 이 부장이나 나나 사장의 돌발 제안에 잔뜩 신경이 쓰였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 부장과 나는 급히 인근 시장에 나가 운동화부터 마련했다.

다음날 아침 약속대로 사장 차로 세 사람은 상당산성 쪽으로 갔다. 산성 길 위쪽에서 차를 멈추었다. 슬슬 내리막 길을 택해 뛰기로 하고 차는 산성 초입으로 먼저 내려 보냈다.

“됐어. 이제 뛰자.”

최 사장의 선창으로 뛰기 시작했다. 20 미터 쯤 뛰었을 가.

“어이, 김 부장,김 부장. 걷자. 걷자.”

“예?”

“어, 힘들어. 걸어, 걸어.”

세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기 시작했다. 2백 미터쯤 걸어가자 사장은 허리를 꾸부리더니 그 자리에서 더 나아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이구, 그만 해. 차 불러.”

나로선 생전 처음이자 사장과 동행한 조깅은 이렇게 끝났다.




'황소집의 해프닝'은 두고두고 말이 많았다.

상반기 실적 보고가 대회의실에서 있었다. 전 임원과 청주 오산 공장장과 본사의 부장들이 참석한 큰 규모의 보고회였다.

점령군으로 최선래 사장 김영태 부사장이 부임한 지 반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계엄의 포고령의 준엄함이 가시지 않은 때였다.

다행히 경영실적이 반전되어 청신호를 주는 보고회가 되었다. 한없이 가라앉았던 조직의 분위기를 고무시키려는 전략적인 의도도 포함되었다. 총평에서 사장의 격려가 그랬다.

보고회가 끝난 다음 회식이 이어졌다.

충무로 3가 막다른 골목에 있는 '황소집'은 등심구이 전문 생고기 집이었다. 반년 가까이 살얼음판을 걷는 판에 등심구이 집 회식은 그동안 언감생심 생각할 수도 없었다.

3십 여명의 참석자들은 최 사장, 김 부사장 그리고 일본인 다나까 부사장을 중심으로 한 방 가득 둘러앉았다.

소주잔이 여기저기 쉴 사이 없이 날았다.

끝내 소주잔은 사장한테 집중되었다. 부장들은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한편 은연중에 사장을 골리려는 심보도 은연중에 깔려있었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어보려는 의도였다.

최 사장은 최 사장대로 눌러온 조직 분위기에 숨통을 틔워주려 이날 따라 노력했다. 허심탄회하게 가슴을 열어보려는 자세가 역력했다. 

 

최 사장은 술이 강하지 않았다. 경제기획원 경제 관료 출신이면서 재무관으로 재외 공관에도 근무해서 평소 행동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계전의 임원, 공장장 등 간부들은 전통적으로 술이 셌다. 생산 제품이 산업용 전기기기라 관을 상대로 하는 특수영업이 많아 접대 기회도 많았다.

갑자기 최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에는 소주잔이 들려 있었다. 식탁 위로 올라섰다.  징검징검 두 발로 걸어서 건너가 끝에 앉아있는 영업부장에게 술잔을 권했다.

긴장을 풀어주려는 의도적 액션이었다.

사장의 식탁 종주는 전무후무한 기록이 되었다. 황소집 해프닝의 전말이다. 결국 사장에게 졌다.




김영태 부사장은 부 과장들과 소주도 한잔 하며 자주 어울렸다. 퇴근시간이 따로 없었으므로 저녁 밥때가 지나기 일쑤였다.

인포멀 그룹 예산도 살금살금 풀어주었다. 한강철교 중간인 중지도에 회사에서 계약된 테니스장이 있었다. 테니스 모임에 참석하여 김두하 테니스회 회장이 맞혀주는 볼이긴 하지만 톡톡 쳐 보냈다. 그리고 저녁 회식에 끝까지 소주잔을 같이 기울였다. 나중에는 당구장으로 함께 몰려갔다.

최 선래 사장은 차츰 풀었다. 웃는 날이 온다. 좋아지고 있다는 말로 격려했다. 신제품 애플2 컴퓨터를 구매하는 신규 투자도 선을 보였다.

사원들은 동아상사 골뱅이를 가끔 찾아가는 여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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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래 사장은 재작년(2007년) 태안의 우리 집에 들렀을 때 지팡이를 짚었다.

그 얼마 전까지 전혀 건강하셨단다. 친구들과 일본에 골프 관광이 무리였다. 여든의 연세에 외국 객지에서 매일 겹친 골프 일정은 과로를 불렀다. 돌아와 바로 입원을 했었다.


지팡이를 짚으면서 우리 집 이곳저곳을 꼼꼼히 돌아보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 쉬운 일이 아니야. 자주 놀러와야겠어."


우리집 뒤 편 바다 건너 구도항. 황해횟집에서 박속밀국낙지타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나란히 앉아 집에서 만들어 보온 통에 넣어와 열심히 죽을 챙겨주는 최 사장 사모님.


서울로 돌아간 최 사장은 나를 식사에 초대했다. 그런 의사를 최 사장을 동행했던 정해진 사장으로부터 여러 번 전해 들었다. 그러나 응하지 못했다. 




빈소에서 최 사장의 영정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어른의 성의를 답하지 못한 착잡함이었다. 초대에 응하지 못할 만큼 내가 바쁜 것도 아니었다. 그 뒤 다시 태안에 오지 못했다.


어른들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태안 우리 집 건너 황해횟집의 점심이 마지막이고 우리 집에서 솔잎차 한 잔 대접한 게 끝이었다. (2009년)


나는 국화를 올리고 향을 피웠다. 최선래 사장님의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재작년 내외분이 함께 내 시골집에 오신 걸음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참 어리석었다.

‘오라고 할 그 때 한 번 더 뵈올 걸.’

시골 태안에 초청해준 걸 감사해 하며 서울 오면 꼭 밥을 사겠다는 말씀을 정해진 사장으로부터 여러번 들었던 터였다.


산전에서 사원 두 사람이 파견되어 빈소 일을 도왔다.

2십여 전 최 사장 부친이 별세했을 때 최 사장 상가는 성북동이었다. 나는 총무부 실무자로 상가 일을 도왔다. 지금 나온 이 두 사원이나 그 때 내가 하던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만 자택이 아니라 병원 장례식장이라는 점만 다를 뿐.

문상객이 많지 않았다. 두 사원도 무료했고 나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정해진 사장과 나는 이 두 사람을 앉혀놓고 금성계전의 지난날을 이야기 했다. 아들 같은 놈 같았다. 지난날이 새삼스레 생각이 났다.

 

그 때 한 친구가 나타났다. 빈소를 다녀온 그 친구는 나와 마주 앉았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종합하자면,...87년에 입사해서 줄곧 청주공장에서 근무해왔다. 최 사장은 82년부터 84년까지 3년 동안 사장으로 재직했기 때문에 최 사장이 회사를 떠나신 후에 입사한 것이다. 과장이었다. 다만 같은 최 씨라는 사실만으로 연줄을 갖다 댈 수 있으나 최 사장과 무 슨 관계일가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그 친구는 두어 시간 동안 내내 말이 없었다. 사양하던 끝에 주위의 강권으로 국밥 한 그릇을 먹었다. 조금 있다가 청주공장으로 가야한다며 신발을 돌려 사라졌다. 세상을 떠난 2십여 년 전의 사장님을 청주에서 멀리 서울로 올라와 빈소에서 굳이 대면을 할 이유를 모르겠다. 나로선 의문이었다.

전임 사장의 빈소에 조화 하나 보내는 걸로 마무리되는 세상에.





-우리의 핏줄은 어째서 하나인가.

한민족이라는 우리의 뿌리를 되짚어 보는 책이 나왔다.

 

'환단의 후예'

 

2006년 11월에 제1권이 나온 후 4년 만에 전 6권 완간을 보게 되었다.

저자는 김영태.

현재 한국소프트웨어 세계화위원회 위원장이며 (주)프리씨이오의 명예회장이다. 

우리나라 IT산업의 제1세대다.

기업출신이며 IT산업의 원로가 역사 대하소설을 썼다.

 

'환단'은 단군의 시조인 환인,환웅,단군이며 '후예'는 단군의 바로 우리를 말한다.

사실과 신화, 전설, 야사와 각종 사료를 동원해서 골격을 세운 다음 소멸된 역사부분은 한,중,일, 3개국의 현장답사와 저자의 상상력으로 복원했다. 

자료 수집과 줄거리의 구상, 집필까지 10 년이 걸린 장편이다. 

시대 배경은 선사시대부터 삼국을 통일한 신라까지다.

 

저자는 3십 대부터 세계적으로 희귀한 강직성 척추염을 안고 살아왔다.  심지어 괴물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45도까지 굽어진 허리를 펴지 못하고 땅을 보며 4십 여년을 살았다.

회사에서 국내업무는 물론 기술제휴, 합작을 위해  세계를 돌아다녀도 쓰러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저런 사람에게 어떻게 대 그룹의 중책을 맡기느냐는 말을 어깨 너머로 듣기도 했다.  야유회에서 곱추춤을 쳐보라는 조롱도 겪었다.

 

주어진 일을 즐겨야 행복하다는 낙업낙토(樂業樂土)가 생활 신조였다

과욕 없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여기에 만족을 느끼며 사는 게 인생관이라고 늘 말한다.

 

2006년 봄이었다.  

8개의 척추뼈에 티타늄 못을 박고 그 위에 프라스틱 판을 부착시키는 12시간의 수술을 받았다.  활발히 '환단의 후예'를 집필하고 있는 중인데도 스스로 단안을 내렸다. 

현대의술과 당사자의 의지가 투합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 후 조금씩 허리를 펴기 시작해 145센티의 키가 이제 160센티로 늘어났다.  고희를 넘긴 연세에 이룬 기적이었다.  

 

럭키금성 그룹(현 LG그룹)의 전무 때 부사장 승진과 동시에 금성계전에 부임해 2년 만에 흑자로 반전시켰다. 


2년 만에 금성사(현 LG전자) 부사장으로, 다시 2년 후 그룹 회장실로 이동했다.

'F-88'이라는 그룹내 20여개사 전기전자 중복 사업을 통폐합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그룹내 정보처리시스템 통합작업을 병행했다.  이를 토대로 미국의 EDS와 합작 기업인 금성STM(현 LG-CNS)을 설립하여 1996년 은퇴 때까지 9년간 초대 사장으로 재직했다.

 

며칠 전 출판기념회(2010.7.26)는 인생의 승리를 축하하는 그런 모임이었다.

나는 여기서 저자인 '김영태 부사장'을 다시 만났다.



작년 2018년 초에는 자작 영어 시집 (A CADLE from the FAR EAST)을 보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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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은 금성계전으로 전환기였다.


'계전소식' 사내보 발간.

'관악산 돌격 대작전'.

'금성계전 장기계획 5개년 계획' 수립.

'목표관리 토론회'

'승전 100리 대행군'


그 때 기획한 일들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