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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귀촌일기- 춘곡 구태회(3) 님과 함께







1971년 : 제8대
1971년 : 의장
1973년 : 제9대 국회의원 
1973년 : 유신정우회 겸 정책연구실장
1973년~1975년
1975년 :
1976년 : 부의장
1979년 : 제10대 국회의원
1979년 : 의장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1971년,

4월 27일에는 7대 대통령 선거와 5월 25일엔 8대 국회의원 선거가

연달아 있었던 그 해 3월부터 1979년 5월까지

구태회 의원의 비서로 근무했다.


24세에서 33세까지 사회생활의 첫 장, 9년을

춘곡님 곁에서 연 셈이다.


풋내기 사회 초년병이 경남 진주에서 치러낸 3 개월의

두 선거를 비롯하여,

서울 인현동 신성상가의 국회 의원회관에서 시작된

국회의원의 사무실,

김영삼 정부 초기에 헐려 사라진 중앙청 4층의

무임소 장관실,

태평로에서 갓 지어 옮긴 여의도 국회 의사당의

국회 부의장실 비서관으로

내가 보고 느끼고 경험했던 정치 주변의 이야기일랑

이 자리에서는 전혀 생략하고...


춘곡 구태회 님은 정치 활동 뿐 만아니라

오늘날 불교 방송국과 불교 병원의 설립의 모태가 된

불교진흥원 이사장,

일제 말기에 동원되어 살아돌아온 학병들의 모임인

1.20 동지회 회장,

육문회, 정각회 등 등을 비롯...


특히

한국청년회의소(JC) 특우회장으로서 활동은 각별하셨으며

나에게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또한 남아 있다.


40대 이하의 젊은이들의 봉사 모임인 JC에

내외분이 주말이면 시간이 나는대로 방방곡곡을 다니며 

전국 회원대회, 지구 대회에 참가하여 격려하셨고

'님과 함께', '뷰티풀 선데이', '해뜰날'

최신곡을 열창하실 때는 환호가 메아리쳤다.





"바쁠 거 없어!"

천천히 정해진 100키로 주행 속도로 가자는 말씀이셨고...


"뭘 얻어먹으러 온 것 같더라."

리셉션 파티 시간을 내가 잘못 안내해서 너무 일찍 갔기에

난처했던 순간을 혼잣말처럼 조용히

이 말씀으로 대신하셨다.


9년 동안 꾸중이라면 이 말씀이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꾸중이었다.


외적으로 온화한 선비의 풍모이셨으며

내적으로는 치밀하고 치열해서

외유내강의 전형이셨다.



농부는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리하여 노오란 새싹이 돋아났습니다.

농부는 물을 주며 거름을 하며

정성껏 가꾸었습니다.


나무는

죽죽 가지가 뻗고

나뭇잎은 울창하게 무성해지며 이젠

아름드리 재목이 되어 갑니다.


우리들에겐 없어서는 안될 동량재!


그래서 농부는 보살피는 손길을

오늘도 멈추지 않습니다.


내일의 행복과 번영을 꿈꾸며

다시 한번 돌보는 농부의 슬기!


이런 슬기야말로 우리 향토의 자랑이요

긍지이며 보람입니다. 


구태회는

바로 우리가 키웠습니다.

구태회는

결코 여러분의 정성스런 뜻을

잊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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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우리의 일꾼은 구태회!

과연 구태회!


구태회를 키우신 보람.


그 보람을

꼭 안겨드리겠습니다.



1979년 초,

10대 국회의원 선거 홍보물에서 나는 이 글을 남기고

6선이며 10대 국회의원 당선을 끝으로

춘곡 님을 떠나 기업체로 나왔다.





춘곡 님도

그 해 가을, 전혀 뜻밖의 박정희 대통령의 10.26 변고에 이어 

정치규제에 묶여 고초를 치르시고 

정계를 떠나셨다.


LG의 창업고문으로 오신 춘곡 님을

LG 트윈타워에서

만나뵈었다.


귀촌에서 생산된 고구마를 보내드리면 좋아하셨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오늘

영원히 떠나셨다.


4년 전, 부인이 먼저 떠난 자리에

영면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