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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윤중제 벗꽃,식목일,국회의사당 그리고 장기영





'기차는 원의 중심을 달린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이 수필을 처음 읽은 지 오십 년이 넘었다.

장기영...하면 이 글이 먼저 생각난다.

장기영이 누군지도 모르던 시절, 나의 최초의 기억이다.


선린상고를 졸업하여 우리나라 경제 부총리를 지냈고 정치 1번지라는 서울의 종로,중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생각은 바로 행동이요, 착상은 바로 실천이었다'는 그의 행동 철학은 한국일보 사주이자 사장으로서 내건 '뛰면서 생각한다'라는 표어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전후 50년대,60년대,경제개발 70년대 우리나라 정치,경제,문화,언론,체육 분야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그의 발자취를 일일이 열거할 생각은 없다.


며칠 전 '만리포와 장기영'이라는 내 블로그 글에 잠시 언급했듯 장기영은 사업가, 기업 경영자의 수완을 타고 났다.

6.25 전후 복구 차원에서 54년 이영진 충남지사의 제의에 의기투합하여 만리장벌 이름 하나로 버려져 있던 어촌 마을을 '만리포'라 명명하고 오늘날 만리포 해수욕장 개발을 선도하였던 면모에서 알 수 있다.


태평로 국회의사당 시절을 마감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준공된 건 1975년이었다.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이 전쟁하 듯 제방을 쌓아 만든 여의도 바닥은 동으로 시범아파트 몇 채에 서쪽으로 덩그런 국회의사당이 전부였다.

국회의사당 주변은 허허벌판이었다.

부지런히 나무부터 심어야했다.

윤중제 둘레에 그 때 열심히 심은 벗나무가 자라 오늘날 우리나라 벗꽃놀이의 상징이 되었다.


1977년 4월 5일 식목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직원들과 서울 근교 야산에 나가 나무를 심었다.

국회의원들도 식목일을 맞이하여 국회에 나와 황량한 국회 앞뜰에 나무를 심었다.

장기영 국회의원도 나무를 심었다.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보자면 왼편 정원에 국회의원, 직원이 어울려 열심히 어린 묘목을 심었다.

그날도 장기영은 평소처럼 지프를 타고 국회에 왔다.

구두끈을 스스로 매기가 버거울 정도로 몸이 뚱뚱하여 낮은 승용차는 타고 내리기 불편했던 것이다.


4월 11일. 장기영 별세.

61세였다.


식목일. 국회의사당과 장기영의 식목.

그리고 4월13일 국회장.

그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그의 재치있는 글은 글을 본업으로 하는 사람들마저도 무색할 정도로 빼어났고

그의 기지있는 재담은 단연 남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그는 팔방미인이었다.